번역 논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번역 논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정주엽 기자
  • 승인 2018.11.11
  • 호수 1485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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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전공 서적을 읽다 보면 지나치게 투박한 표현 때문에 한 번쯤 이 말을 내뱉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흥행 내내 자막 오역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개봉한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은 번역가의 이름을 비공개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고 분노한 관객들은 ‘번역가 실명제’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올렸다.

이런 논란을 시작으로 번역 시장의 민낯이 드러났다. 많은 번역 관계자들은 이제야 번역가 개인의 문제에서 번역 시장 전체로 논의의 폭이 확장됐다고 말한다. 특히 약 20여 년째 중·한(中·韓) 출판 번역에 몸담고 있는 김택규 번역가는 “최근 불거진 번역 논쟁은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고선 또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달픈 ‘번역가’들의 삶
번역 시장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번역가들의 낮은 처우다. 많은 번역가들은 제때 지급되지 않는 번역료로 인해 번역 작업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김 번역가는 “번역료 지급이 두세 달 늦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전업 번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의 등의 겸업을 해야 간신히 본업을 지탱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번역가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도 지적된다. 김 번역가는 “대부분의 번역과정은 매우 촉박하게 진행된다”며 “특히 영상 번역의 경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해 거의 하루에 한 편의 영상을 번역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더불어 번역을 연구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도서 「번역청을 설립하라」의 저자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번역 연구는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며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글 콘텐츠의 성장을 저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입 번역가를 배출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마련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특히 김 번역가는 “비정기적으로 개설되는 출판번역가들의 강좌 정도가 번역 공부를 할 수 유일한 통로”라고 우려했다. 이러한 문제는 번역가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난관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런 좁은 문과 열악한 환경은 신규 번역 인력의 성장을 저해하고 번역 시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최소한의 보호를 위한 발걸음
이처럼 번역 시장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이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이 함께 모색되고 있다. 먼저 국가 차원에서 번역 사업을 지원하는 ‘번역청’ 설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박 교수는 “이미 중국, 일본,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는 번역 기구를 중심으로 번역 수준을 관리해 그 질을 높이고 있다”며 “국가 주도로 번역가들을 관리하고 이들에게 적절한 지원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실무집행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와 비슷하게 번역가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변역 협회’에 대한 요구도 존재한다. 김 번역가는 “현재 대한번역가협회는 오로지 번역 자격증 시험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며 “현장 번역가들이 직접 참여해 그들이 처해 있는 일선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나가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 중에서도 현장 번역가들이 가장 크게 요구하는 것은 번역료 지급을 담보하는 안전장치다. 김 번역가는 “표준 최저 번역비 및 번역비 지급 기한 등의 강제 조항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야 한다”며 “번역료가 나오지 않을 시 보험사에서 먼저 돈을 지급하고 후에 출판사에 돈을 요구하는 ‘번역 보험’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 확보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번역으로
이에 정부와 관련 기관은 앞서 제시한 번역 시장의 문제점에 공감하며 행동에 나서고 있다. 최원휘<교육부 학술진흥과> 사무관은 “동·서양 인문학 고전들의 번역 작업을 지원하는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 사업의 예산을 내년에 2배가량 증액할 예정”이라며 “대학 중점 연구소 중 번역 관련 연구소를 특별 선정해 이를 지원할 계획도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박 교수는 “정부에서 가치가 높은 고전들을 선정해 이것의 번역을 지원한다면 능력 있는 연구자와 번역가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이는 자연스레 실력 있는 번역가를 대우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그러나 번역 시장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국가 정책들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에서 펼치는 지원책들이 민간 번역 시장에 효과를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번역가는 “‘좋은 번역’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시장의 개선을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번역가의 일과 사명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이 점진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번역에 관한 소비자의 꾸준한 관심과 대안에 대한 논의가 오늘보다 더 나은 번역의 장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도움: 김택규 번역가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최원휘<교육부 학술진흥과> 사무관
고다경 수습기자 dakyung304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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