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우울증은 칼을 쥐어주지 않는다
[아고라] 우울증은 칼을 쥐어주지 않는다
  • 정서윤 기자
  • 승인 2018.11.05
  • 호수 1484
  • 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서윤&lt;문화부&gt; 정기자<br>
▲ 정서윤<문화부> 차장

현재 대한민국은 ‘심신미약국’이다. 살인사건을 저질렀다하면 범죄자들은 심신미약부터 주장하고 본다. 지난달 4일 거제시에서 과도한 음주 후 폐지를 줍던 노인을 느닷없이 때려 사망에 이르게 한 거제도 살인사건, 그리고 ‘심신미약’의 가해자가 PC방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21살 청년을 살해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두 사건 은 모두 가해자가 내세운 범행 사유인 심신미약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8년 9살 여아를 잔혹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이 체포됐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인한 짓을 저지른 그는 법정에서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알콜의존증이 심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오직 가해자의 심신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일어난 범죄 때문에 피해자는 수년을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형법 제10조에 따르면, 심신상실자와 심신미약자로 인정된 자의 범죄에 대해 형을 면제 또는 감경하도록 규정돼있다. 이는 ‘행위 당시의 책임 여부’에 따라 형벌을 부과해야 한다는 ‘책임 원칙’이 따르기 때문이다. 단순한 성격 결함이 아닌 중대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정신 상태에 한해 심신미약 감형이 가능하지만 별도의 구체적인 적용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심신미약 판정은 의학적인 판단이며 감정 결과 수용 여부는 재판부의 고유 권한이다.

대한민국을 큰 충격에 빠뜨린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자 일명 ‘김성수법’이 뒤늦게 발의됐다. 이는 현행 조항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이다. 심신미약 상태의 범죄 행위에 대해 죄질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감형을 적용하는 형법 조항은 부당하기에 ‘감형할 수 있다’는 임의조항으로 바꿔 법을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심신미약의 범죄자 감형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어렵다. 여전히 심신미약자에 대한 감형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이다. 물론 살인과 같은 특정 범죄는 심신미약 감형을 못하게 하거나 심신미약 기준 자체를 삭제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피의자 심신미약상태 판단 기준을 좀 더 엄격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거제 살인사건’,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반드시 짚어야 하는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된 최근 사건들이다. 21살 청년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당당히 우울증 진단서를 제출하는 김성수, 어린여아를 끔찍하게 성폭행하고 알콜의존증이라는 이유로 곧 출소하는 조두순,  32분동안 무지막지하게 무차별폭행 및 살인 후 만취 상태여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거제시 살인사건 피의자, 이들은 심신미약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삶을 앗아간 살인자다.

대한민국의 울툴불퉁한 심신미약 기준을 적용받아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그들은 우리에게 국민적 분노와 불안감을 안겨줄 뿐이다. 법은 범죄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 김성수의 잔혹한 범죄행태를 폭로한 피해자 담당의사가 한 말을 기억하자. “우울증은 칼을 쥐어주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