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틀릴 수 있는 사회
[장산곶매] 틀릴 수 있는 사회
  • 김도렬 편집국장
  • 승인 2018.09.03
  • 호수 1480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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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렬<사진·미디어부> 부장
▲ 김도렬<편집국장>

△세대 갈등 △정치이념 갈등 △지역 갈등 그리고 최근 가장 논란이 되는 성별 갈등까지. 최근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갈등의 양상이 보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생각의 차이가 나는 상황 그 자체를 문제라고 보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지금까지 ‘다른 삶’을 살아온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각의 차이로 인한 의견의 대립은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

핵심은 생각의 차이 그 자체가 아닌,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생각의 차이 자체에서는 갈등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양측 간의 갈등과 감정적인 소모가 나타난다. 분명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걸 교육 받고 자라왔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그건 ‘틀림’에 대한 강박에서 나온다. 우리는 틀리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큰 압박을 느낀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틀린다는 그 사실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틀렸을 때 나타나는 사회의 반응은 개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때로는 자신의 의견이 틀린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정치계가 그렇다. 5년 전에는 결사반대하던 정책들이 지금은 국가를 살릴수 있는 최고의 정책이 된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 없이 나타난다. 물론 그사이에 많은 경험을 하며 생각 자체를 바꾼 것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 자신이 틀린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딱히 설득력이 없을 때가 많다. 그저 자신들의 과거 논리는 그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할 뿐이다. 의미 없는 감정 소모와 정쟁은 이러한 태도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이는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주장하는 이유 자체를 흩트린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한 주장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억지 주장이 되면 이는 가치가 없어진다.

이런 현상을 없애기 위해선 우리는 틀림에 대한 강박부터 없애야 한다. 그 과정이 합리적이고 정직하다면 결과가 어떻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과정부터 비상식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비판 해야 하고 개인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합리적인 과정이 진행된 후 나온 결과적인 실패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침착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뛰어나다고 해도 말이다. 합리적인 판단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실패에 대한 관용을 통해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이나 두려워하는 실패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틀리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선 틀리는 것을 숨기게 되고 회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실패와 좋지 않은 결과는 이후 더 큰 실패로 다가온다.

틀림을 통해 개선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나 자신부터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자.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남의 주장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캐스린 슐즈는 교양프로그램 ‘TED’에서 ‘틀리는 것’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녀는 강연에서 “우리가 옳다는 것에 집착할 때, 오히려 우리의 실수를 막지 못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번씩 옳은 것과 옳다고 믿는 것을 혼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진짜’ 실수는 반복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명언이 세상이 나오기약 1000년 전 기독교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실수함으로써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실수가 당연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틀릴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틀림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인간은 창조할 수 있었다. 틀릴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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