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한양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다
87년 6월, 한양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다
  • 이율립 기자
  • 승인 2018.05.28
  • 호수 1478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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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 뜨거운 그 날과 함께한 한양인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열기로 뜨거웠던 그 날과 함께한 많은 한양인이 있다. 최상명<경제학과 84> 동문, 이대범<건축학과 86> 동문, 한광희<산업공학과 87> 동문 역시 그 순간과 같이 호흡했다. 그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학우들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날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한다. 6월 민주항쟁, 그 날의 기억을 세 동문과 함께 눈앞에 그려보았다.

▲ 최 동문, 한 동문, 이 동문이 87년도를 추억하고 있는 모습이다.

“역사 속에 모두가 있는 거지. 다른 이도 나와 다르지 않았어요.”
87년도에 부총학생회장으로 시위에 앞장섰던 최 동문은 위와 같이 말했다. 세 동문에 따르면 군부 독재 시절에는 사복경찰이 수업에 잠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최루탄을 쏘는 차인 페퍼포그(Pepper Fogger)나 탱크가 학교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국가로부터 학습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87년은 군사정권의 탄압과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가장 극화됐던 시기에요. 당시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경계가 없었죠.”

한 동문은 87년도에 신입생으로 입학해서야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됐다. 대학생 때 처음 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비디오가 그를 민주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군인이 국민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죠. 군부 독재가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 시절 그들에게 민주화운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대학생은 물론 온 국민에게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문구를 퍼지게 했다. 이 동문은 87년도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확 달랐다고 기억했다. “박종철 열사 사건은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많은 공분을 샀죠. 데모하러 학교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나갈 때면 전과 달리 버스가 꽉 차곤 했어요.”

그렇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온 국민적으로 커지던 어느 날, 6월 10일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규탄대회’가 개최됐다. 이는 6월 민주항쟁의 신호탄이었다. 한양대 학생들 역시 같은 날 ‘범국민규탄대회 출정식’을 개최하며, 민주화운동을 이어나갔다. 학교 앞 도로에서는 가두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학생이 연행되기도 했다. 최 동문은 “그 당시 한마당과 아크로폴리스는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한 동문도 당시 한양대 학생들의 시위 열기가 대단했다고 전했다. “교내 행진을 하는데, 애지문에서 시작해 병원 후문 쪽으로 학교를 한 바퀴 돌아왔는데도 출발하지 못 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어요.”

▲ 87년 5월, 학생회관에 학생들이 결집한 모습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6월
당시 한양대는 남대문 시장 쪽을 맡아 집회를 주도했다. 이 동문은 남대문 시장에서의 기억을 생생히 말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쫓아왔어요. 아슬아슬하게 도망치곤 했죠. 남대문 시장에서 명동으로, 서울역으로 다시 남대문으로 왔다가 아현동까지 뛰어다녔어요.” 한 동문도 그 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한 동문은 비폭력 시위를 위해 사람들이 전경들의 방독면을 벗기고 무장해제를 시켰던 장면에 크게 감동했다. “시청역 근처 신세계 백화점 옆에 분수대가 있는데, 거기서 전경들을 둘러쌌어요. 방독면을 다 벗기고,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얘기했었죠. 그게 역사적인 장면인지는 나중에야 알았어요.” 이후에도 학생들은 계속해서 비폭력을 외쳤고, 전경들에게 꽃을 전달하기도 했다. 물리적 힘은 별 거 아니었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중요했다.

학교와 남대문 시장 쪽의 집회를 주도하던 최 동문은 학생들과 구교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 21명의 학생과 함께 연행됐다. 6월 13일의 일이었다. 최 동문을 제외한 학생들은 전원 훈방됐지만, 최 동문은 6·29선언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폭력을 쓰지 말자며 페퍼포그 위로 올라갔어요. 30분 정도 페퍼포그를 쓰지 않다가 이후 사람이 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쏘더라고요. 바깥으로 떨어졌는데, 도망갈 새도 없이 잡혀갔죠.” 정신없이 구금됐던 그 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실제로 내려지진 않았지만, *위수령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은 머리칼을 쭈뼛 세웠다. “간수가 ‘학생, 위수가 내려진대’라고 슬쩍 얘기해주더라고요.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을 때, ‘어머니 위수가 떨어진대요.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피해야 해요’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걱정하실까봐 못하겠더라고요.”

▲ 최 동문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애국한양 2학기 투쟁 진군식'을 주도하는 모습이다.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그 날의 기억들
“6월 항쟁을 죽음의 장례식으로 끝을 낸 거죠.” 최 동문은 이렇게 말했다. 박종철 열사로 시작된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세 동문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1987」은 그때의 기억을 그들에게 다시 떠올리게 했다.

“갈피마다 온갖 생각이 다 날 것 같아 영화를 못 보겠더라고요.” 이 동문은 이렇게 말하며 “운동을 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죽을 수 있다는 의식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최 동문은 영화를 보다 그 날의 기억으로 잠시 기절을 했다. 최 동문은 그의 아내가 그를 끌고 바깥으로 나와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최루탄을 쏠 때는 위쪽으로 쏴야 해요. 안 그러면 사람이 죽죠. 영화를 보면서 최루탄을 정면으로 마주하니까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아, 나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양대에도 민주화를 부르짖던 열사가 있다. “그 친구는 우리에게 멍에 같은 거죠.” 고(故) 최응현<섬유공학과 87> 열사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본교 공대 건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 열사는 87년에 신입생으로 입학하며, 민주화운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88년 5월 전방입소 철폐투쟁을 주도했다.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이철규 열사의 사인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11일 동안 단식 농성을 하는 등 민주화를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90년 최 열사의 장례식이 한마당에서 거행될 당시 한 동문은 “응현이는 저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에 살아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본지 830호 7면). 한 동문은 그 날을 다시 떠올리며, 지난해 87학번 홈커밍데이에서 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 것을 언급했다. “명예 졸업을 한다는 게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도 ‘너를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가 전해지길 바랐죠.” 한 동문은 그 날 동기들과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날의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이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이 동문도 그 중 하나다. “고생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했지만, 그 20여 일 동안 세상의 좋은 건 다 본 것 같아요. 지금도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때, 그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죠.” 최 동문도 6월 항쟁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신화 같은 것이라 말했다. “여전히 저에게 30년 전에 했던 6월 항쟁이라는 싸움은 삶의 어떤 선택의 기준, 표상이라고 할 수 있죠.”

▲ 87년 여름, 학생회관 앞 학생들의 모습이다.

촛불혁명이라는 역사를 새로 쓴 이 시대의 후배들에게
“1백만 명 이상의 사람이 광장에 모여 하나의 모토를 가지고, 하나의 몸짓을 한다는 것만큼 큰 예술은 없어요.” 이 동문은 촛불집회를 보고 ‘아, 예술이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87년 6월 항쟁을 이끌던 학생도 대단하지만, 탄핵 촛불집회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형태는 다르지만 87년도의 수고로움을 그 촛불집회 때 젊은 친구들이 해냈다고 생각해요. 젊은 친구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죠.”

어떤 일에 파고들다 보면 자신의 권리와 상충되는 지점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싸우는 자세가 민주주의를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이 동문은 “권리를 그냥 포기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나의 명랑한 삶을 방해하는 게 있으면 지체 없이 싸우든지, 피해갈 방법을 모색하든지. 그게 스스로 민주주의를 익혀나가는 과정이에요. 항상 깨어있고, 항상 재미를 느끼고 살았으면 해요.”

최 동문은 후배들에게 “내가 얼마만큼 나로서 잘 살고 있는지 바라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지금은 어둡고 암흑한 시절이 아니니까 사회의 모순된 점을 찾아 운동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선배들이 만들어준 민주주의 터전에 내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민주적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눈감고 타협하며 꼭 봐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해요.”


*아크로폴리스: 현재 본교 서울캠퍼스의 역사관(구본관)과 사자상이 위치한 곳을 뜻한다.
*백골단: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학내 시위자들과 시위 군중들을 진압하고 체포하기 위해 구성된 사복경찰관을 말한다.
*위수령: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이다.

사진 김종훈 수습기자 usuallys18@hanyang.ac.kr
사진 제공: 최상명<경제학과 84>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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