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月, 뜨거웠던 그 날의 기록
六月, 뜨거웠던 그 날의 기록
  • 윤혜진 기자
  • 승인 2018.05.14
  • 호수 1477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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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755호 1면 기사이다.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 재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보도는 당시 언론 검열이 있었던 시대임에도 정부에 반하는 기사를 썼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황병주<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이미 정세가 정권에게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론들도 더 이상 권력의 눈치만 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6월 항쟁에서 대학생들을 빼놓을 수 없다. 박찬승<인문대 사학과> 교수는 “6월 항쟁의 주력은 대학생이었다”고 말했다. 1987년의 한대신문 역시 이처럼 민주화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던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6월 항쟁 당시, 한대신문은 그들을 어떻게 담았을까?

불씨가 꺼질 수 없는 불길이 되기까지
6월 9일·10일 범국민 총궐기준비위원회(이하 준비委로 약칭) 발족식이 지난 1일 오후 1시 한마당에서 개최됐다.…“현 정권은 고(故) 박종철(朴鍾哲)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사건 등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짓밟고 있다. 이에 청년학도는 역사적인 책무를 자각해야 한다”…<본지 754호 1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는 민주화 불길을 더욱 지핀 계기가 됐다. 1987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임기 말로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선거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어려운 간선제로 운영됐다. 이에 간선제를 직선제로 전환하자는 국민들의 개헌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러한 요구에 반하는 호헌조치를 4월 13일에 발표했다. 윤해동<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호헌조치는 국민들에게 군사 독재 체제가 계속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줬다”며 “이는 박종철 사건과 겹쳐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키웠다”고 전했다.

이런 열기에 우리 학교도 동참했다. 6월 1일에 ‘6월 9일·10일 범국민 총궐기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 발족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돌입했다. 발족식에서 준비위원장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대학생들, 6월 항쟁을 이끌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 ‘범국민규탄대회’를 시작으로 약 20일간 진행된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0일 이후 △6·10대희원천봉쇄 규탄 및 이한열 학형 뇌사 사건규탄대회 △군부독재 종식과 살인적 최루탄 추방을 위한 제7차 실천대회 △시국대토론회 △최루탄 추방을 위한 범국민 대행진을 위한 출정식 등의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는 특별위원회위원장의 주도로  「호헌철폐·독재 타도」를 외치며 25분간 연좌 농성을 벌였다.…<본지 755호 1면>

…한편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민투라 약칭)는 집회를 열고 소위 꽃다발 사건은 우리들의 투쟁한계를 긋는 개량적 투쟁방식이라 규탄하고 교내폭력시위에 참가했다.…<본지 755호 1면>


‘호헌철폐·독재 타도’는 6월 항쟁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이었다. 윤 교수와 황 연구관에 의하면 이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자민투)’라는 민족 해방(National Liberation) 계열의 학생운동 세력이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당시 학생운동세력은 만족해방 계열의 자민투와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민민투)’라는 민중민주(People’s Democracy)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자민투가 개헌을 주장했다면 민민투는 제헌을 주장했다. 두 세력은 방향성이 달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또한 황 연구관은 우리 학교 역시 이런 양상을 보였다고 설명하며 당시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도 자민투 세력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전경이 강력히 저지하자 화염병, 투석 등을 투척하며 맞섰다.…<본지 755호 1면>

…학생들은 계속 비폭력을 외치며 전경들에게 꽃을 전달하기도 했다.<본지 755호 1면>


당시 학생운동은 경찰의 최루탄의 맞서 화염병이나 돌을 던지는 등의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면서도 경찰에게 꽃을 전달하는 비폭력시위도 동시에 진행됐다. 황 연구관은 이런 비폭력시위를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표현했다. 그는 “폭력적인 상황에 치닫게 되면 시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다”며 “운동세력에서 대규모 군중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전술적인 방침을 쓴 것”이라는 의견을 전했다.
 
6월 항쟁, 막을 내리다
많은 이들이 참여한 시위 끝에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담긴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2일 여야 공동 발의로 제출한 개헌안이 통과됐다. 직선제 전환 이외에도 △대통령 5년 단임제 △언론·출판의 허가·검열 금지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 금지 등 기본권이 강화되었고, 노동삼권을 보장했으며, 헌법재판소를 신설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문화했다. 이 개헌안은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6월 항쟁이 군부정권 시대를 종식 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분열됨으로써 바로 민간정부가 들어서지 못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윤 교수는 6월 항쟁을 해석할 때 세계사적 흐름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6월 항쟁을 한국 사회만 초점을 두고 이해하면 좁은 시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에 의하면 개혁적인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등장하는 등 1980년대 후반 세계는 개혁과 개방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외 소식을 접하기 힘든 한국 사회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6월 항쟁은 이런 시대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현재 촛불시위를 통해 민주화를 지켜냈다면 그 이전에 이들은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우리가 현재의 자유를 거머쥘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뜨거운 6월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이다.

도움: 박찬승<인문대 사학과> 교수
윤해동<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황병주<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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