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논리와 논거가 없는 주장은 독단이고 망발일 뿐이다
[교수칼럼] 논리와 논거가 없는 주장은 독단이고 망발일 뿐이다
  • 김용헌<인문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1.02
  • 호수 1470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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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헌<인문대 철학과> 교수

“바른 역사(를)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한 말로 국정역사교과서로 공부하지 않은 대다수 국민은 비정상적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하지만 “(기존 교과서에서) 부끄러운 역사로 보이는 게 어떤 부분이냐”는 질문에는 고작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고 답했을 뿐이다. 

정미홍 전 아나운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궁정동에 여자들을 불러서 술판을 벌였다는 소문을 부정하고, “내가 박정희 시절 대학 다닐 때 잘 나갔는데도 궁정동으로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소문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트윗을 올렸다고 한다. 이쯤 되면 논리의 타당성 문제를 넘어 과대망상증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김정숙 여사를 향해 “운동해서 살이나 좀 빼시길. 비싼 옷들이 태가 안 난다”며 비아냥댔으니, 막말을 넘어 인격살인이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MBC가 정상적인 국민들한테는 신뢰받고 있다”고 함으로써 대다수 국민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더니, 또 문 대통령을 가리켜 “평소 소신대로 했으면 우리나라는 적화되는 길을 갔을 것”이라는 소신(?)도 밝혔다. “미국보다 북한 먼저 방문하겠다”, “사드배치 안 하겠다”는 등의 언급이 현실화되었다면, 적화통일이 되리라는 근거 없는 망발이었다. 

10여 년 전 쯤 UC버클리 한국학센터의 방문학자로 머물던 때의 일이다. 미국유학 경험이 없던 나는 영어 공부를 할 요량으로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주로 시사주간지를 읽고 토론하는 과정과 말하기를 위주로 한 과정 두 가지였다. 말하기 과정은 필요에 따라 원어민 티쳐에게 글쓰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나라 문단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국문과 교수 한 분이 서투른 영어이긴 하지만 밤새 고생해서 에세이 한 편을 써 오셨다. 하지만 원어민 티쳐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그 교수도 매우 당혹해 했다. 영어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터이지만, 글쓰기 기본이 안 돼 있다는 식의 혹평이었으니 한 평생 글쓰기로 업을 삼아 온 분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대졸 티쳐에게 글쓰기를 지적받았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외국인에게 영어 말하기를 지도하던 글쓰기 비전문가가 글쓰기 전문가의 글을 비판하는 어긋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의문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은 최근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 녀석의 영어 글쓰기를 지켜보면서이다. 표현 수준이나 내용의 깊이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글쓰기 방식만큼은 놀라웠다. 주장이 담긴 예문을 주고 그 주장에 대한 찬반의 견해를 기술하도록 한 것인데, 한마디로 철저하게 논증적인 글쓰기 방식이었다. 도입-주장-이유(1)와 구체적인 논거-이유(2)와 구체적인 논거-결론으로 이어지는 형식이 그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이유 및 그 이유를 밑받침하는 구체적인 논거를 2~3가지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그 형식의 초점이다. 녀석이 배우는 글쓰기 방식을 통해 미국의 초등학교 글쓰기 교육을 확인하고는 새삼 10여 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글쓰기 비전문가가 글쓰기 전문가에게 글쓰기의 기초를 운운하면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반복된, 논거와 논리를 중시하는 글쓰기 훈련 덕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글이 논증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논거와 일관된 논리를 갖춘 글보다 한 줄로 된 시 한 편이 훨씬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고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또 논증적인 글이라도, 꼭 위 형식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주장과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의 제시, 그리고 논거와 결론 사이의 논리다. 논리는 무시하고 논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주장만 난무하는 세태를 보면서, 혹시 그 원인이 어려서부터 논증적 글쓰기를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교육 환경 탓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논리와 논거가 없는 주장은 독단이고 망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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