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우수상] 한낮
[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우수상] 한낮
  • 김준성<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1기> 군
  • 승인 2017.12.03
  • 호수 1469
  • 8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것은 태어나지 못한 아이와 죽지 못한 어른의 이야기다.

아이의 머리는 어미의 골반모양대로 자란다. 열 달 동안 자란다. 열 달은 자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긴 시간이다. 삼과 삼분의 일 계절을 지낼 수 있는 시간이다. 헛배가 불러오는 시간. 미래를 앞당겨야 하는 시간. 당연히 되찾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자동차를 자유롭게 빼앗길 수 있는 시간. 누구보다 뚜렷한 눈을 가지고 들어와, 딜러보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룰렛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지낸 아이가 적절치 못한 때에 밖으로 나와야 하는 시간이다.

* * *

한낮의 유령

한낮의 유령, 정오의 유령을 보았다고 P와 T는 말했다. 이해 할 수 없단 K의 표정을 보고 P와 T는 역시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라며 낄낄거렸다. 카지노 주변의 숲은 밤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 같았다. 높이 솟은 리조트는 중세의 성처럼 보였고 카지노는 성 밑의 마을처럼 느껴졌다. 성은 P와 T를 불렀지만 정작 성은 P와 T의 입장을 거부했다.

유령이라니. K는 생각했다. 지금은 확실히 좀비의 시대지 유령의 시대는 아니었다. 극장에 가도 좀비영화가 있지 유령영화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한낮의 유령이라니. 그런 무시무시한 건 보통 한밤에 나타나지 않나. 정오만 되면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슬픈 얼굴을 하고 2층 난간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카지노를 내려다본다. T는 그렇게 말했다. 그 나이대의 아이는 카지노에 들어올 수 없고 사, 오 분 뒤에 사라지니 유령이 확실하다. P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물에 젖은 솜처럼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T와 P는 동시에 말했다.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은 소녀를 본 P와 T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좀비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대에 무기력하게 붙어있는 유령이라니. 이상했다.

K는 카지노에 온 이후로 헛배가 불러오는 증상을 느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배가 고파도 먹고 싶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 때문이라 추측했다. 입안에선 흙맛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나친 카페인 때문이라 생각했다. 메스꺼운 트림도 늘었는데 무언가 목안에 걸린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수시로 헛구역질을 해댔고 그러다 진짜 구역질이 나오기도 했지만 점액 따위가 나오진 않았고 건조한 목구멍만이 느껴졌다. 결국 K는 헛구역질을 하기 위해 양치질을 했다. 그것으로도 안 되면 탄산을 마셨다. 카지노에서 무료로 먹을 수 있는 탄산을 먹다가 질리면 캔음료를 사 먹었다. 탄산캔 밑에는 언제나 비현실적인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제 이곳을 사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사북역이다. 정확한 주소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사북리다. 폐광과 함께 사북이라는 이름도 닫혔다. 그 대신 정선 레일바이크나 환상의 눈꽃열차, 대관령 하늘목장과 같은 이름이 열렸다. 물론 강원랜드도 간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사북은 1960년대 중후반 광업소가 들어서면서 외지인들의 유입으로 1973년에 인구 삼 만의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정선은 2000년대 초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외지인들의 유입으로 인구 사 만의 군(郡)이 되었다. 도시가 다시 도시가 되었고 외지인이 만든 도시를 다시 외지인들이 만들었다.

T는 일자형 어깨에 각진 얼굴을 지닌 사내였는데, 유령의 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T는 K에게 소녀의 발이 완벽한 타원형에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발이라고 항상 강조하였다. 그럴 때면 P는 무슨 소리냐고, 그저 평범한 발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T와 P는 잠시 싸우게 되는데, 유령 자체를 보지 못한 K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T는 소녀 유령을 바라볼 때면 표정이 아득해졌다. T는 일 년 전 잃어버린 자신의 세 살 배기 딸을 이런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T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T는 딸의 발에 맞는 신발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P는 자신의 말끔한 외모에 맞게 유령의 귀와 귀걸이에 집착했다. 커다란 링으로 된 귀걸이, 작은 회색 알이 박힌 귀걸이, 길게 늘어뜨린 빛나는 알갱이가 걸린 귀걸이에 대해 말했는데, 그러면 또 어김없이 T와 싸움이 붙었다. P가 소녀의 귀걸이는 작고 알맞은 것이라고 주장하면 T는 소녀가 항상 신발을 신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K는 귀걸이와 단화가 어떻게 맞부딪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무튼 둘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 P는 소녀를 볼 때마다 잠시 다른 곳에 갔다 오는 듯했다. P는 죽은 아내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P는 결혼한 적이 없다. P는 아내를 안타까워하며 그리워했다.

K는 한낮에 나타난다는 그 유령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열여섯 소녀의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 또래의 여자가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게 짜증났다. 꿈에서라도 보려 눈을 감았지만 죄다 악몽만 나왔다. 밤에 꾸는 꿈에는 그나마 요즘 시대에 맞는 좀비가 나왔다.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라고 K는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에 씌어진 안전모와 손에 들린 곡괭이, 온통 새까맣고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 어두운 인상, 무엇보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반신과 얇고 다부진 몸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K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것이 뜨는 것보다 좋은 시절이었다.

P와 T의 증언이 일치하는 날도 있었다. 2층 난간에 걸터앉은 우울한 소녀가 하늘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하느님.”

T와 P는 하느님이라는 말에 주목해서 소녀가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었던 자신의 딸과 아내라는 주장을 펼쳤다. K는 T와 P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열여섯 소녀가 어떻게 하늘을 보며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것도 어떤 신에게 기원할 정도로. P와 T는 소녀의 눈동자가 특이하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액체로 이루어진 것 같아서, 연못처럼 자신의 모습이 환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T는 그렇게 큰 자신의 몸이 어떻게 소녀의 작은 눈동자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K는 처음으로 소녀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K는 소녀의 눈동자가 여동생의 눈동자와 같을 거라 상상했다. 그날은 어머니가 밤에 급히 나간 날이었다. 동생은 울었고 K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K는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그날은 아버지가 무거운 무게 추에 깔려 죽은 날이기도 했다. 장례식장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와 어머니에게 귓속말을 할 때에도 K는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하늘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늘나라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사람이 산다면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하고 동생은 물었다. K는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K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고 상상 속에서 그 모양이 동생의 그것과 같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K는 동생이 없었다. K의 망막엔 어두운 점들이 군데군데 찍혀있었다.

전화는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야 한다. 군대에서의 규칙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는 게 K에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모텔의 주인은 목을 맨 시체가 귀찮다고 했다. 무섭지는 않고 그저 귀찮다고 했다. 매일 아침 생존을 확인하는 모닝콜을 받으면서 K는 전화기를 붙들던 시절을 기억했다. 그때는 일주일 넘게 전화기를 잡고 있어도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백육 개의 연락처가 있었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도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듣는 모닝콜 벨소리는 다정한 똑똑똑, 은 아니고 쿵쿵쿵 층간소음이다. 호텔 앞 호수에 던진 핸드폰은 영원히 잠수하고 있을까. 호수는 이따금씩 분수 쇼를 보여줬다,

T가 살던 아파트 12층 베란다에서는 광장의 분수대가 보였다. 커피숍은 열 시에 오픈을 하니까, 집사람은 아홉 시면 나간다. 그러면 T는 집에 혼자 있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분수를 뿜어 올리는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그걸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평탄하게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무리하지 않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답이 왜 이렇게 나와 버렸나, 하고 T는 생각했다. 먼저 나가면 뭐 돈을 더 준다 그래서 나온 건데, 몸은 이미 망가졌고 집에서 할 건 없었다. 분수를 한 시간 동안 바라보다 돌아서서 거울을 보면 소주 서너 잔 먹은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개도 천 원짜리는 안 물고 만 원짜리만 문다. 해장국을 먹으며 P는 이곳에 전해져오는 농담을 생각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고, 탄광 돈은 햇빛만 보면 다 사라진다는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통하는 것 같았다. 여기는 돈이 흐르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거지 생활해도 하루 15만원은 번다. 들어갈 수만 있다면 자리를 팔거나 손을 빌려주거나 ‘뽀찌’라고 하는, 노하우 같은 걸 알려주고 받는 커미션을 구하면 된다. 하긴 새벽 여섯시 반에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 읍(邑)이 얼마나 있을까. P는 계산을 위해 지갑을 열었다. 이렇게 만 원짜리를 하나하나 세다보면 육십 만원이 크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선 조그마한 칩 하나가 백만 원이다.

이곳 카지노는 일반적인 카지노와 다르게 곳곳에 거울과 시계가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카지노의 법칙과 다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몰골을 확인하고 지금의 시간을 체크할 수 있다. 그래도 이곳 카지노는 한국의 다른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익을 올린다고 직원은 말해주었다. P가 초반에 종종 돈을 딸 때 “아저씨 게임 잘하시네요.”라고 말하던 직원이었다. P가 얼마 안 있어 중독센터를 들락거릴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도박을 왜 그렇게 하세요.” 여기서는 따면 게임이고 잃으면 도박이다. P는 말했다. 그리고 연구결과에 따르면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룰렛에 이쑤시개를 끼워 넣으며 말했다.

K는 꿈을 꾸었다. 주변이 온통 하얀색이었고 하늘에선 함박눈이 세게 흩날렸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풍경에 현기증이 났다. 모든 것이 표백된 듯 하얗게 보여서 공간감과 원근법이 죽고 소실점이 사라졌다. 그 흰 색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우유 아이스크림의 색을 닮았고 그래서 K는 어떤 포근함과 충족감을 느꼈다. 희미하고 몽롱한 시야였고 후각은 마비된 듯 느껴지지 않았다. K는 눈을 먹어보기 위해 손을 뻗어 눈을 모아 혀를 대 보았다. 눈에서는 탄 맛이 났다. 그러자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하고 알 수 없는 검은 먼지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한편으로는 검은 기름이 냇물처럼 흐르고 가끔씩 소주병이 그 위를 떠다녔다. 매캐한 시멘트 가루 냄새가 났다. 공간감이 살아났고 원근법이 세워졌다. 소실점의 끝에는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였다. K는 그것을 바라보려했다. 하지만 그의 망막에는 어두운 점이 묻어나왔다. 시야를 흐릿하게 하는 검은 안개를 걷어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찾으려 할수록 선명함은 바스러지고 흐릿함이 피어올랐다.

넥타이를 목에 맨 채로 죽으면 관심거리가 된다. 넥타이를 목에 매고 슬롯머신에 걸린 채 죽으면 더할 나위 없다. 카지노 안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종종 있다고 했지만 그런 식으로 죽으면 인기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모텔 주인도 관심을 기울일 정도면 그 특이함이 크긴 큰 것 같다. K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다급하게 움직이며 그런 특이한 죽음을 알리는 카지노 직원과 보안요원을 등 뒤에 두고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뒤로 겹겹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의 등 뒤로는 들것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P와 T는 특이한 죽음이 있기 직전, 무기력한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고 했다. 어김없이 한낮에 나타난 소녀는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날지 말지 잘 생각해보고 결정을 해라. 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요.”

K는 소녀의 알 수 없는 문장을 들으면서 전날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한밤에 꾼 꿈에는 지난번의 좀비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쪽이다.”

K는 P와 T가 비웃을 거라 예상하고 꿈에서 좀비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P와 T는 낄낄거리거나 헛웃음을 치지 않고 대신 무언가에 대해 추리를 하자고 했다. P와 T는 넥타이의 자살이 사실은 타살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화려한 루미나리에 밑으로는 하얀색 스프레이가 칠해져있었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몸집이었다. 그 위로는 아무렇지 않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추리를 한다기에 사건현장을 살펴볼 줄 알았는데 P와 T는 나가자고 했다. 덕분에 K는 처음으로 사북에서 중천의 해를 보게 되었다. 세달 만에 본 한겨울 한낮의 햇빛은 찬란하기보단 지겨웠고 그래서 덜 서글펐다. K가 처음 사북역에 내릴 때는 눈 내리는 밤이었다. 기차가 사북역에 들어서자 전당포와 모텔, 술집 간판들이 조악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란한 불빛은 산골의 밤을 밤처럼 느끼지 못하게 했다. 카지노를 둘러싼 도시 전체가 불면증에 든 것 같았다. 사북역 바로 앞에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가정의 행복까진 배팅하지 마십시오.”라고 적혀있었다.

T와 친하다는 전당포 집으로 가게 되었다. 전당포 아저씨는 독실한 교인이었는데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근데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하고, 더 이상 어디서 차용을 할 수 없으니까 전당포를 찾는 거니까, 전당포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람들이 망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시계는 원래 T의 것이었다. 전당포에는 집에 돌아갈 때 타고 가려했던 자동차들이 쌓여있었다. 전당포 아저씨는 K에게 맡길 차가 없냐고 물었고 K는 기차를 타고 와서 없다고 했다.

굳이 전당포까지 와서 하는 P와 T의 추리는 수상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사망자의 신원이나 주변 환경을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고 다만 유령의 말을 곱씹었다. 그들은 소녀의 발언이 사건의 단서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려주세요.”나 “태어나고 싶어요.”가 어떻게 단서가 될 수 있는지 K는 궁금했지만 아무튼 P와 T는 그런 식으로 사망자가 어떤 사람일지 추리를 했다. P는 벤처 창업을 하려다가 망한 사업가라고 했고 T는 수능을 망친 스무 살 학생이라고 했다. 사북에 부동산을 사두고 손익을 겪고 있는 투기꾼이라는 이야기도 나왔고 최근 선거에서 야심차게 출마했다가 떨어진 군수 후보라는 의견도 던져졌다. K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듣다가 며칠 전에 꿈에서 잿빛 풍경을 보았다고 말했다. P와 T는 K의 말을 듣자마자 사망자가 강원랜드의 하청용역 업무를 맡고 있는 퇴직광부라고 단언했다. 전당포 아저씨도 그 단언에 동의했는데 K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석탄산업합리화계획’과 ‘폐광지역개발지원에 대한 특별법’으로 들어서게 된 강원랜드 카지노는 일정 비율의 사북주민을 채용해야한다. 카지노가 들어설 당시에 환경단체와 시민단체가 반대했지만 퇴직광부와 주민들은 황폐화된 폐광촌의 7평짜리 사택촌을 보여주면서, 이곳을 모두 흙으로 덮어서라도 카지노를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존권 차원에서 남들이 싫어하는 핵 폐기장이나 쓰레기장, 교도소까지 요구했으니 카지노 따위가 못 들어올 이유가 있었겠냐고, 아저씨는 말했다. P는 실상 사북주민들이 카지노가 아니라 카지노 하청업체에 주로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쓸데없이 집값이 올랐는데 과연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T는 말했다.

유령의 행보를 좀더 지켜보기로 하고 P와 T, 그리고 K는 전당포에서 나왔다. 전당포 아저씨는 K에게 맡길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했지만, K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이죽거렸다. 그러자 아저씨는 이왕이면 아는 사람 집에 맡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K는 섬뜩했다. P는 나가면서 자신의 2010년 형 검은색 그랜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거는 아무도 안 사요? 그러게, 탄 빛이어서 그런가. P는 앞으로 검은색 차는 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단서는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다음날 정오에 소녀 유령은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였다.

“나는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아요. 좁은 길에다 모두가 컴컴해요. 오직 온갖 소리만 나는 곳이에요.”

P와 T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탄광의 막장에 대한 묘사였다. 사망자가 퇴직광부라는 P와 T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징후였다. K는 도대체 왜 P와 T에게는 보이는 유령이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유령을 근거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주장도 싫었다. 그래서 반대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전날 밤 꾼 꿈을 기억해 내려했다. 매번 나오는 좀비가 또 나와서 무슨 말을 해주었는데 결과는 K의 의지와는 반대의 것이었다.

“사실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K는 억울해하며 석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이 꿈에 나왔다고 밝혔다. P와 T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K는 사망자가 이런 식으로 확정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심도 없던 죽음이었는데 그런 식의 관심은 막고 싶어졌다.

K가 머무는 사북의 겨울은 달이 심심치 않게 떴고 달빛은 어김없이 K가 머무는 모텔의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감은 눈꺼풀에도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때문에 K는 눈을 감아도 선잠에 들었다. 선잠에는 악몽이 나왔다. 좀비가 나오는 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K가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그 좀비가 되곤 하는 꿈이었다. K는 좀비가 되어 앉을 수도 없는 낮은 천장을 가진 굴 안에서 무릎을 꿇고 검은 돌에 쉴 새 없이 곡괭이질을 해댔다. 부서진 검은 돌을 뒤로 보내면서 K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꿈의 현실도 현실이었다. 참을 수 없지만 참아야 하는 더위, 온갖 회색 먼지로 희미해진 시야와 온몸과 작업복 사이에 자리 잡은 땀, 허리를 조금이라도 피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머리와 검은 가루로 가득한 입가, 동료들의 혐오스러운 살결과 숨결은, 꿈의 현실이었다.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은 그것에 대해 잘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K는 굽은 허리로 검은 돌무더기를 옮기다가 잠에서 깼다. 추워서 문을 잠갔다. 달빛은 여전히 넘어 들어왔다.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비린내가 났으나 몽정은 하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으로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성욕은 모두 룰렛에 바쳐진 듯했다. 룰렛을 엄지와 검지로 쓸어 올리는 것은 애무였고 배팅은 곧 사정이었다. 과거에 사정을 했던 건 여자를 떠나고 싶어서였고 지금 배팅을 하는 건 카지노를 떠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배팅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배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K는 여자를 사서 안고 사정을 했다. 몸을 팔고 칩을 사는 여자였다.

한낮의 장례식장은 한창의 분위기가 모두 끝난 채 늘어져있었다. 몇몇의 조문객만이 뜸하게 밥을 먹고 있었고 상주와 유가족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오자는 건 P와 T의 의견이었다. 사북에 하나밖에 없는 장례식장은 3층 높이의 작은 건물이었고 식장 옆에 장례물품 집이 하나 있을 뿐 한산했다. 주변에 별다른 교통편이 없어 그들은 P의 검은 차를 전당포에서 잠시 빌려와야했다. P와 T는 사망자가 여기에 있을 거라 했고, K는 사고가 일어난 지 오래되어 이미 발인이 끝났을 거라 짐작했지만, 자신도 정확히 몇 일전에 사고가 일어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화면엔 호실, 고인, 유가족, 발인, 장지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었다. 고인의 생전 사진도 나타나있었다. 화면에 띄워져있는 얼굴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K는 저들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삶의 사연과 행로를 알지 못하는 이들임에도 그랬다. 고인은 대부분 여자였고 노인이었다. 카지노 노숙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장례를 치르는 듯했다.

이곳에 온 이유도 잊어버린 채 P와 T는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상주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어줍지 않은 절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 같았다. P와 T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방안에는 향 탄 냄새가 났다. P와 T는 상주에게 각자 자신의 가출경험을 떠들어 댔다. 미처 잊어버린 일을 떠올린다는 식으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늙은 상주는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목안에선 검은 가루가 느껴졌다. 검은 가루는 소주로 씻어내야 했다. 노인은 하얀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P와 T는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P와 T의 하소연은 K에게 이빨 빠진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괴이한 광경을 마주하다가 K는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영정사진의 눈동자에는 반쯤 희미하게 비친 K의 얼굴이 겹쳐있었다.

한낮의 소녀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도 K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유령은 이번에도 어떤 말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저는 어쩌다가 이 세계에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제발 저에게 이 세계에서 나갈 길을 가르쳐주세요. 다시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세요.”

P는 죽은 사망자와 살고 싶은 소녀를 나란히 놓으며 죽는 게 쉬울지 사는 게 쉬울지를 토론에 부쳤다. T는 당연히 사는 게 쉽지 않겠냐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사람은 모두 살고 싶어 하니까. P는 그러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T는 그래도 살고 싶을 거라고 답했다. P는 죽는 건 한 순간이지만 사는 건 열 달이 필요하니 죽는 게 더 깔끔하고 귀찮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T는 그러면 죽었지만 다시 살 수도 있는 것은 죽지 않은 것인지, 살지 않은 것인지를 헷갈려 했다. P와 T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라고 K는 생각했다.

사망 사건의 추리 따위는 어린 시절 같은 곳으로 던져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T는 사망자가 잭팟을 터뜨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꺼번에 수억을 벌어버려서 카지노 측에서 몰래 죽인 게 아니냐. P는 잭팟을 터트리면 감추는 게 아니라 손바닥 도장을 만들어 입구에 붙여놓는다며,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그런 사실을 감출 리가 없다고 말했다. P는 그것보다는 삼각관계가 원인이 아니겠냐며 말을 늘어뜨렸다. 카지노에 혼자 와서 연인이 되거나 심지어 부부가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잦았다. T는 그러기에는 도는 소문이 너무 없고 소녀의 증언과도 맞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K는 우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꿈에 또다시 나타난 좀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런 곳들을 찾아가 냄새를 맡아볼 의무 같은 게 있다. 가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낫겠지만 말이다.”

K는 냄새를 맡아봐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퇴직광부에 대해 알기 위해선 폐광에 들어가 보아야겠지 않겠냐고, 가자고 했다. 이제 나는 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 * *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태어나지 못한 아이와 죽지 못한 어른의 이야기다.

아이의 머리는 어미의 골반모양대로 자란다. 열 달 동안 자란다. 하지만 완전히 자라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은 그저 사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산다. 아이의 머리가 어미의 골반을 모두 채워서 나와야 될 때. 하지만 밖은 점점 추워지고 아이에게 입힐 옷은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 아이를 환영하는 사람이 그 누구도 있지 않은 환경.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나올래? 미래는 올까? 혼잣말이었으나 정말이지 반기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들 입장만 생각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닌가요? 그건 정말 너무 이기적이니까요.”

“결국 미래에 아사하거나 자살하거나 하는 성가신 일을 암묵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발전된 방법을 쓰니까 아이에겐 큰 고통도 없어요. 지금 당장에 죄의식을 갖는 것은 철없는 감상주의에 불과합니다.”

의사는 말했다. 수술을 끝낸 의사는 말했다. 무슨 대단한 인문학자인 것처럼 말했다. 살인자 주제에,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간호사는 내 팔에 주사를 놓았고 깨어나 보니 커다랗던 배는 쭈그러들어 있었다. 추웠다. 병원에서 나와서는 구토를 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보다 배로 심한 헛구역질과 구역질이었다. 사북의 밤은 각종 간판으로 밝고 환했다. 그러나 그건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밝음이었다. 어두운 밤눈에도 구토는 선명하고 하얗게 흩날렸다. 그날 밤에는 눈이 내렸다.

아이의 아비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안아야하는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어느 날 밤, 나는 내가 안은 남자를 손가락으로 세어보다 손가락만으로는 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에도 누군가 들어왔다. 여기 사람들은 밥 먹을 돈은 없어도 칩과 여자 살 돈은 있었다. 위장은 비어도 자존심이 비어선 안 됐다. 그래서 내 배가 찼다가 다시 비워져야 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이니까요. 나는 이기적으로 배를 비워야했다.

강원랜드 쪽박걸. 나처럼 몸을 팔고 칩을 사는 여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말했다. 자유. 너는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카지노 직원은 말했다. 자유를 얻는 건 생각만 바꾸면 되는 일이라고, 너만 원한다면 영구출입금지를 시켜주고 귀가여비까지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자유롭게 자유를 도둑맞고 사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자유롭게 사타구니와 골반이 저리는 데도 손님을 맞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콘돔을 끼지 않고 삽입을 해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태어날 거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카지노 노숙자도 내가 자유롭게 이러는 거라고 했다.

넥타이에 대해 생각했다. 룰렛에 대해서도. 그 넥타이는 주제넘게 내 처지를 걱정해주던 남자의 것이었다. 그 새끼의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받았다. 그들에 따라 자세를 바꿔야 했다. 나는 그 순간 그들이 되었다. 나는 각진 얼굴의 사내, 말끔한 표정의 남자, 어수룩한 청년이 되었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었다. 나는 우울해지고 나태해졌다. 헛배가 불러왔다. 수십 번의 마른 헛구역질 끝에는 트림이 나왔다. 트림은 말했다. 너무 우스운 일 아닌가요? 무기력한 눈빛으로 룰렛에 대해 생각했다. 넥타이에 대해서도. 넥타이를 매고 룰렛에 걸쳐 앞선 두려움으로 죽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죽었으나 나는 여전히 카지노에 남겼다.

태어났어야 할 아이였다. 아이의 미래는 빼앗겼다. 나태한 중독자는 아이의 미래를 앗아가 버렸다. 몽상가는 미래를 미리 취함으로써 만족한다. 낮에 꾸는 꿈을 진정한 현실로 간주해 행복할 미래를 현재로 앞서 가져온다. 이것이 몽상가의 전략인 동시에 중독자의 전략이다. 중독자는 잭팟 이후 한껏 채워지고 높아진 자신을 상상하며 배팅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낭비하지만 낭비한 현재가 미래가 되는 것이 중독자의 배팅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할 그 배팅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미래가 짓밟혀야 했던 아이가 내 아이다. 아버지의 배팅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배팅을 해야 했다. 미래는 올까? 발전된 방법은 아이의 배팅을 큰 고통 없이 끝내주었다. 아이는 자신의 배팅을 타인의 손에 의해 포기해야했다.

유령은 내 아이다. 아이의 미래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태어났더라면 자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녀는 아이의 미래다. 소녀는 말했다. “살고 싶어요.”, “태어나고 싶어요.”, “다시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분명히 말했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소녀는 내 아이가 맞고 그래서 내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그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한다. 아이의 아버지를 찾는 것은 살지 못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다.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서 반드시 물을 것이다. 당신의 미래는 대낮의 햇볕처럼 뜨겁냐고. 그리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책임지지 못할 그들의 미래를 빼앗아 아이의 미래를 장만할 것이다.

“나는 산업전사 광부였다.” 석탄유물보존관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석탄유물보존관은 카지노에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한낮의 낯은 눈부시고 시렸다. 피부가 당길 만큼 추웠으나 긴박함보다는 웅크린 무기력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P와 T는 햇빛에 익숙지 않아 어지러워 휘청거리며 나아갔다. 그들은 마치 햇빛에 취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보존관에는 그대로 보존해놓은 게 많았다. 공동 샤워장에는 물을 아껴씁시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 방한복에는 대통령 선물, 이라는 단어가 박혀있었다. 장화를 씻는 세화장에는 다시 연탄을 만들 수 있게 지하철 환풍구 같은 장치가 있었다. K는 산업전사들이 썼을, 총신이 아주 기다란 총처럼 보이는 장비를 만져보았다. 가는 구멍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던 장비라고 했다.

광차를 타고 갱도 안으로 들어가 보는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다. P, T, K는 광차에 탑승했다. 나는 그들의 뒤에 탑승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광차는 예상과 달리 별다른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출발했다. 그래도 P와 T, K의 얼굴에는 룰렛을 돌릴 때 이상의 긴장한 표정이 보였다. K의 생각이 들린다. K는 특별한 기대를 하고 있다. K는 소녀를 보고 싶었다.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도대체 소녀는 언제 나타날까. K는 소녀가 말한 좁은 길에다 모두가 컴컴하고 오직 온갖 소리만 나는 곳이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소녀는 없었고 갱도 체험은 싱겁게 끝났다. 안전모를 쓰고 안전교육까지 받고 들어갔지만 입구에서 오 분정도만 들어간 뒤 오 분짜리 동영상 하나를 시청하고 바로 나왔다. 한 시간을 기다려 얻은 결과였다. 별다른 건 없었다, 고 P와 T는 생각했지만 별다른 건 있었다. K가 밤에 꾸는 꿈에 나오던 좀비가 나타났다. 꿈을 꾸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낮에 좀비가 나타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K는 자신이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건지 의심했다. 좀비는 동영상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에, 희미한 갱도의 불빛을 배경으로 나타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탄광을 생각할 때 깊이와 더위를, 암흑을, 그리고 채벽을 파내는 시커메진 사람을 생각하되, 기어서 몇 킬로미터를 왔다 갔다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이것을 K는 P와 T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 온 이유를 망각한 것 같았다. 보존관을 빠져나오면서 P와 T는 사망자의 사인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인이란 강원랜드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실상의 타살이었다. 우선 낮은 승리률이 그 타살의 실체다. 강원랜드 카지노의 승리률은 30%도 안 되는데 외국 카지노를 경험한 준전문가에 의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승리률이라고, T는 격분했다. T에 따르면 그건 한국에 내국인 카지노가 하나밖에 없어서 손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일어나는 일이었다. 커피숍에 가서 오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손님 대우를 받는데 여기는 하루에 몇 백씩 잃어도 손님대접 한번 안 해준다며 T는 다시 화냈다. 이와 더불어 퇴직금도 얼마 받지 못한 퇴직광부의 도박중독을 도박중독센터가 막지 못했다. P는 교육만 받으면 다시 카지노에 들어가게 해주는 도박중독센터가 사실상 도박재활센터라고 말했다. 중독센터는 강제로라도 퇴직광부의 출입을 막았어야 했다. 본인동의가 없어서라는 변명이 과연 변명이 되는 거냐고 P는 따졌다. 그렇게 둘은 이 사건을 강원랜드 카지노에 의한 타살적 자살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오후 네 시였다.

해장국을 먹고 사북 시장을 둘러보다보니 밤이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카지노에 가지 않고 폐교된 초등학교의 운동장 스탠드에 앉았다. 폐교된 초등학교는 막장처럼 어두웠다. 밤인데 아지랑이가 피어있었다. 스탠드에는 P, T, K 순으로 앉았다. 나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소녀 유령은 보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이기적이었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들의 소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당신들의 정액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세 사람의 남자 중에 아이의 아버지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 남자 중에 분명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럼 이제 찾아야하지 않겠는가. 아이의 아버지를. 아이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나를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P와 T는 아직까지 카지노를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카지노에 다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K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듯이 크게 소리쳤다. 그것은 정당한 결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죽음에 정당한 결론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K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명확하고 간단하게 죽었을 리 없습니다. 화를 냈다. 그렇게 빠르게 죽음을 확정하고 성급히 확실한 누군가를 욕하고 부드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반발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죽음을 평생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분을 냈다. P와 T는 맞받아쳐 화를 낼 수는 없었고 그저 당황해야했다. P는 소녀의 말을 근거로 나온 결론이라고 작게 말했다. 그리고 소녀의 말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음에 대해 말할 거냐고, 덧붙였다. K는 세상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는 유령의 말을 도대체 왜 믿느냐고 따졌다. 유령의 잘난 그 얼굴을 나도 제발 한번 보고 싶다고,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말했다. 그러자 소녀가 나타났다.

“밥을 먹고 우리는 찐도리를 하려고 운동장에 나갔다. 그런데 효진이가 운동장 구석에 쓸쓸히 앉아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곧 엉엉 울 것만 같았다. ‘아마도 효진이는 사북 사태로 끌려간 엄마 생각을 하고 있겠지. 참 안 됐다.’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에도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상은 정말 공평하지 못한 것 같다.”

소녀는 내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 소녀는 내 아이가 태어나지 못해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자랄 모습의 유령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찐도리도, 효진이도, 사북 사태도 모르는데. 저 아이는 분명 내 아이인데 무슨 일일까. 왜 내가 모를 말을 할까. 그것도 이번에는 밤에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소녀는 알 수 없는 말을 다시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이번에는 K도 유령을 보고 있었다. K에게 처음으로 소녀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K는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T는 소녀의 발을, P는 소녀의 귀를 바라보았다. T의 딸과 P의 아내와 K의 여동생은 원래 없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잊어버린 것은 애초에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잃어버린 것이 없으므로 다시 찾아야 할 것도 없었고 소녀는 그들의 딸이나 아내나 여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딸의 발과 아내의 귀와 여동생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 아이는 유령이 되었다. 그래서 소녀는 분명 내 아이인데 내 아이가 맞고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데 내 아이는 없었다. 나는 소녀의 말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잠꼬대를 듣는 것처럼 들어야했다.

* * *

봄날이 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아직 오지 않은 봄의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나느냐고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답했다. “만달레이에서 위건까지 가는 길은 멀고, 내가 그 길을 택한 이유는 당장은 분명치 않다.” 소녀는 내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의 모든 것은 내 아이의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없다. 소녀는 그 누구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열세 달은 내 아이가 누군가의 소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종종 백일몽을 꾼다. 무언가 걸린 느낌을 비워내려는 헛구역질은 늘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젠 유령이 꾸는 꿈에 대해 상상한다. 탄광의 광부와 카지노 노숙자. 아이스크림과 석탄. 태어나지 못한 자와 죽지 못한 자. 당신의 일부인 유령과 좀비. 이 이야기는 태어나지 못한 아이와 죽지 못한 어른의 이야기다. 아내와 동생과 아이는 없고 유령만이 남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즐기고 즐길 수 없는 것을 가진다. 유령만이 꿀 수 있는 꿈이다.

<끝>


* 작중 소녀 유령의 발언의 일부는 조세희, 『침묵의 뿌리 : 趙世熙 제3작품집』(열화당, 1985) 및 임길택· 사북초등학교 64명 어린이, 『아버지 월급 콩알만하네』(보리, 2006)에 실린 동시를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 작중 좀비의 발언은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례출판, 2010, 이한중 옮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