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대상] 떨어지는 낙엽과 같이
[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대상] 떨어지는 낙엽과 같이
  • 김지훈<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3> 군
  • 승인 2017.12.03
  • 호수 1469
  • 8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day

아파트 옥상에 올라선 기분을 처음 알았다. 옥상에 접근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보통은 옥상 문이 잠겨 있으니까. 지금은 뭐, 문고리를 따고 들어왔다. 그나마 차인의 특기라 부를 수 있는 게 문따기, 다시 말해 락픽(lock pick) 정도니까. 열쇠를 넣는 공간도 막아버렸으니 문을 부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이곳에 올 수도 없다. 애초에 공사하다만 아파트라 올 사람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제야 방해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혼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자살한다.

정황상 락픽으로 나쁜 짓을 해오다 덜미가 붙잡혀 체포되는 상황에 처해서, 궁지에 몰린 상황 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락픽은 정말 순수한 취미생활로 혼자 자물쇠를 가지고 놀거나 집 곳곳의 문을 잠갔다 푸는 용도로 썼을 뿐이지 밖에서 일체 사용한 적이 없었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세상에 질렸다.

그 정도 멋들어진 말로 정리하고 생을 마감하자.

“그건 그렇고 미친 듯이 떨리는구나. 젠장….”

차인은 등에 맞댄 철조망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한 발짝만 내밀면 저승길이 눈 앞인데, 이건 뭐 내려다 볼 수가 있어야지. 살짝 내려보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지릴 것 같다.

“투신자살은 아닌가? 아닌가? 아, 제기랄, 딴 방법을 찾아봐?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다고. 아냐아냐. 이건 아냐. 애초에 고소공포증 가진 놈이 아파트 20층까지 올라와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우워어, 이러다 진짜 뒤지겠네.”

눈 딱 감고 뛰어내리면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죽어.

너도. 죽어.

구더기가 들끓는 눈동자, 줄줄 흘러내리는 배설물.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내며 심호흡을 했다.

“더 살아서 뭐하겠냐. 누가 행복하겠어. 그냥 죽자.”

혹시 모를 보행자가 있을까 아래를 훑어본다. 죽는 건 혼자면 충분하다. 다른 누구를 대신 죽일 생각도, 길동무로 함께 데려갈 생각도 없다.

그때 차인의 시야에 펄럭이는 흰 천이 보였다. 아파트 건너편에 위치한 병원 옥상이었다. 여자로 보이는 형체가 이쪽을 향해 흰 천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 저거, 벌써 귀신이 보이는 건 아니겠지. 뭐야, 무섭다고.”

차인이 자신을 보는 걸 눈치 챘는지 천을 휘날리며 옥상 중앙으로 움직인다. 그곳에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구……해줘……? 구해줘?”

고개를 끄덕였다, 고 느껴졌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거지? 아니면 죽기 전에 원래 이런 건가? 그건가? 저승사자나 사신 같은 뭐 그런 계열의 녀석인가?”

관계하면 더 험한 꼴을 볼 듯싶어 무시하자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계속 차인을 지켜보던 그가 힘없이 쓰러졌다. 미동조차 없었다.

흰색 천과 구해달라는 신호,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병원 옥상. 차인은 숨을 삼켰다. 자살하려는 그를 막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해달라는 의미였다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상을 바란 것도, 보답받길 원하는 것도, 과거의 잘못을 덮고자 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차인은 철창을 넘어 병원으로 향했다.

“객관적으로 보자고. 내 몸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막혀 있다. 그치? 문고리라도 있으면 따보려고 노력이라도 할 텐데, 이건 어쩔 수가 없군. 돌아간다.”

병원은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자동문 앞에 두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옙.”

“무슨 일로 오셨죠?”

뒤에서 나타난 여성은 차인을 데리고 카운터 앞으로 가더니 차인을 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너머로 차인을 바라본다.

간호사였나 보다.

“만약 진찰을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가능하시구요.”

“아뇨, 아파서 온 건 아니구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더니 간호사는 ‘그럼 왜?’라는 표정을 보인다.

한숨을 내쉰 차인은 결국 옥상의 일을 설명했다. 자살을 하려다 발견했다는 것은 제외한 채. 간호사는 납득을 한 듯 “아아, 린을 본거구나. 올라 가보렴. 엘리베이터 타고 8층. 거기서 한 층만 더 계단으로 올라가면 옥상이야.” 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반말이다.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요? 갑자기 쓰러졌다니까요?”

“린이라면 괜찮을 거야.”

“급성발작이나 뭐 그런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글쎄, 그렇게 걱정되면 올라가보라는 소리야.”

그러더니 차인의 등을 떠민다.

결국 안 가보고는 못 배길 듯 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차인은 문득 생각이 나서 간호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반말이시죠?”

“뭐 어떠니. 딱 봐도…….”

카운터 앞으로 몸을 내밀고 차인을 보던 그녀는 스스로 자괴감에 사무친 듯 얼굴이 굳었다. 차인은 흡족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간호사의 반응을 보면 린이라는 여자는 평소에도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걸까. 흰 천을 휘두르고, 구해줘란 글씨를 써두고, 갑자기 쓰러지는 걸 정상이라 볼 수 있는 걸까.

어느새 옥상 앞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외부에서 잠글 수 있는 형태였다.

“밖에, 내 목소리 들려요?”

차인은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대답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락픽을 꺼내 열쇠구멍에 맞을 사이즈를 넣고 손끝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물고기가 입질을 보내듯 손끝에 걸리는 느낌을 받으며 좀 더 락픽을 움직인다. 착 맞아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손잡이를 비틀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스스로 성공했다는 뿌듯함에 주먹을 쥐었다.

“오, 제법인데? 진짜 되는구나, 도둑질.”

흰 천을 둘러싸고 있는 여성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도둑질이 아니라 락픽입니다. 락픽은,”

“락픽은 건전한 스포츠라는 소리가 하고 싶은 거지?”

얼굴의 절반이 흰 천에 가려져 있는데 용케 이쪽을 본다. 솔직히 무서웠다.

“하지만 사유지에 불법 침입한 시점에서 건전한 스포츠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렇다고 도둑질이냐고 말하고 싶은 거야? 뭘 훔쳐야 도둑질이 되는 게 아니냐고? 훔쳤지. 내 시간. 나만의 사생활 시간. 이렇게 네 녀석과 대화하는 사이에도 내 시간은 줄고 있는걸? 그래도 발뺌할 셈이야? 그러면 정말 도둑놈 심보지, 안 그래?”

목소리는 날카롭기보다 명량했고, 신랄하기보다 발랄했다. 그 이유는 분명 린이라는 이 여자가 발밑에서 애벌레처럼 기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선 풀어주지 않을래?”

“무슨 논리로 ‘그러니까’라고 말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앉아 천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남은 기껏 위급한 상황인줄 알고 달려왔더니만…….”

“위급하지. 위급하고말고.”

얼굴을 가린 천을 풀어내자 검은 머릿결 너머로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네 녀석 죽었을 거잖아.”

소녀는, 린은 그렇게 말했다. 이미 건물 옥상에서 철조망 붙들고 있던 장면을 목격당한 터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차인을 꿰뚫어보는 심미안 같았다.

“독심술은 못해.”

움찔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표정에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 미세한 눈썹의 꿈틀거림이나, 볼의 떨림, 눈동자의 흔들림과 주름의 움직임, 안면근육의 수축 등 얼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태산이야. 육체적 습관이나 버릇까지 더해서 단순한 사고는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거 뿐이지. 특히 네 녀석처럼 얼굴에 다 드러내는 녀석들은 더 쉽고.”

어느새 천을 다 풀어낸 린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차인과 마주했다. 아직 십대로 보이는 미소녀에 가까운 여자였다. 솔직히 반할만큼 예뻤다.

“고마워.”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참고로 나이는 내가 더 어릴 테지만 존댓말 할 생각은 없으니까 네 녀석도 편하게 말 놔.”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왜 그래? ‘제멋대로인 녀석’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

“반말을 하는 건 뭐, 그렇다 쳐. 부탁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곳에 날 데려가주지 않을래? 아, 너무 크게 잡았구나. 네 녀석이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 응, 그렇게 하자.”

차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만 잠깐만, 뭘 혼자서 다 결정하고 있는 거야. 내가 왜 그런 부탁을 들어줘야하지? 그리고 말마다 ‘네 녀석’이라고 부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김차인이 내 이름이니까.”

“차인 찬 차니, 좋아 차니.”

이상한 이름이 되었다.

“부탁을 들어줘야하는 이유는 네가 살아있다는 게 근거가 될 수 있겠네. 차니가 자살하려는 걸 막은 거니까. 생명의 은인이잖아?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보는데.”

죽으려는 사람 건져내놓고 구해줬으니 돈 내놓으라는 식이다.

“다르지. 죽고 싶지 않았지만 죄책감 때문에 몸을 던지려 한 거니까.”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죄책감이니 뭐니 말하는 건데?”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 나는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말했잖아, 얼굴에 써져 있다고. 도망치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다면 말릴 수밖에 없어.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는 방법이니까.”

더 이상 남은 사람조차 없어, 라고 입 밖으로 나올 뻔 한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린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알아챈 기색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도와줄 수 있겠어?”

린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시 자살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원상복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을 터였지만, 그것이 표면상 같을 뿐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차인이었다. 린이 그를 부른 시점에서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낭떠러지를 향하는 그의 인생에 그녀가 새로운 갈림길을 제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건 죄책감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닌 차인 자신의 의지였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었다.

“알았어.”

그의 말을 들은 린은 의외라는 듯 웃었다.

“잔뜩 구슬려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정말 도와줄 줄은 몰랐는걸.”

린은 들고 있던 천을 꼭 껴안았다.

“내 생각은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했잖아. 그런 능력은 내게 없다고. 아, 그래도 여유부릴 시간은 없을 거야.”

그녀는 리듬을 타며 난간으로 걸어갔다. 고개만 살짝 돌려 차인을 바라본다.

“나 30일 후에 죽거든. 그러니까……응, 늦어도 30일 안으로 내 소원을 이뤄줘야 해.”

마치 “한 달 후에 여행 좀 다녀올게, 그 동안 집 잘 지키고 있을 수 있겠어?”라며 정해진 계획을 말하는 부모처럼 덤덤했다. 단지 자식을 두고 가야하는 일말의 걱정이 담긴, 그런 눈빛을 린에게서 느꼈다.

린은 차인의 반응을 살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차인이 악질적인 농담으로 치부하려하자 말을 덧붙였다.

“죽는다는 건 사실이야. 내가 옥상에 매달린 차니의 표정을 어떻게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대충 느낌으로 알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은 그녀가 여자인지조차 뚜렷이 알아볼 수 없는 거리였다.

“타인에 비해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되어 있어서 그래. 200미터는 족히 더 떨어진 너의 얼굴이 보일만큼. 시각뿐만이 아니야.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인간의 오감이 극도로 발달되었고 그 영향은 마치 독심술을 하듯 타인을 꿰뚫어 본다, 고 해둘까. 응, 그러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난 독심술이 가능한 대단한 사람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차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난간에 기대어 있던 린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여기에 있는 거야.”
 

D-30 (土)

밖에 나가자며 그녀가 차인에게 부탁한 것은 외출증이었다.

“네가 가서 받으면 되잖아. 나는 너의 보호자도 뭐도 아니라고.”

“동반자잖아. 죽음에 가장 가까운 동반자.”

두 사람은 차인이 아파트 옥상에서 봤던 ‘구해줘’ 란 글씨의 소재를 모으고 있었다. 린이 쓴 글이라고 착각한 그것은 널어놓은 빨래들을 뭉쳐 만든 것이었다.

“이거 들키면 진짜 죽는 거 아냐? 카운터에 있던 간호사 아줌마도 장난 아니던데.”

아하하, 린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연 언니 앞에서 아줌마라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걸? 본인의 말로는 아직 29살이니까 말이야.”

“흔히 30대에 접어든 여자들이 말하는 거잖아, 그거.”

“그럴지도 모르지.”

“너라면 알고 있을 거 아냐, 진짜 나이.”

“여자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야. 여자는 환상의 동물이니까, 가르쳐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다가는 다칠 거야―라고 지연언니라면 말하겠지.”

한 순간이지만 냉담하게 그를 밀어내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차인은 자신이 실언을 내뱉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심술에 ‘가까운’ 능력은 분명, 그녀가 원치 않는 것마저 보여줄 것이다. 그로 인해 겪었을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외출증 받아올게. 기다리고 있어. 바로 올 테니까.”

차인이 나가자 린은 빨래를 모아둔 곳을 침대 삼아 누웠다.

“그러니까 표정에 너무 드러난다고, 바보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카운터로 내려간 차인은 지연 ‘누나’에게 외출증을 받으러 왔다고 전하자 그녀는 예상이라도 한 듯 거절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선생님께서 내린 결정이라 누나도 뭐라고 해줄 수가 없네. 원한다면 지금 만나볼래?”

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연은 차인의 뒤로 시선을 돌리며 턱짓을 했다.

“보이지? 한창 TV에 정신 팔려있는 사람.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원하는 의사 선생님이니까 한 번 가보렴.”

지저분하게 머리가 뻗친 장발의 남성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꾸깃한 가운까지 걸치자 좋게 봐주면 철야를 3일정도 한 연구원정도로 봐줄 법했다. 예능 방송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혹시 의사 선생님이신가요?”

차마 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대답이 없자 혹시 간호사가 거짓말을 했나 싶어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병원 내부 회선으로 연락을 하며 차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못 믿겠지만 그 사람이 의사선생님이야’ 라고 들린 듯 했다. 체념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의사는 검지를 피며 차인의 말을 멈췄다.

“조용히. 지금부터 중요한 장면이다.”

이어서 예능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작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관찰하듯 볼 뿐이었다. 웃음이나 행복에 대한 탐구를 한다거나 혹은 저 예능에 퇴원한 환자가 나온다는 둥 분명 의사로써 중대한 임무라고 차인은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을 입은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TV를 꺼버렸다.

“류진, 이게 무슨 짓이지?”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린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왔습니다. 일단 원장실에서 얘기라도 들어보시죠.”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은 이미 15분 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놈의 예능은 어차피 주말 총편집 재방송으로 또 볼 거 아닙니까. 눈앞의 사람을 먼저 신경 쓰시죠.”

의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류진이라 불린, 훨씬 의사 같은 사람이 성큼 다가오더니 그의 입에서 담배를 뺏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것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류진, 난 네가 싫다.”

“저도 당신이 싫습니다.”

의사(원장을 겸하고 있는 듯하다)와 그의 조수로 보이는, 류진을 따라 원장실로 향했다. 의사를 마주보고 자리에 앉자 류진은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의사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예능을 보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린의 외출증을 받고 싶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 죽음의 동반자,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 관계를 설명하라고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만난 지 겨우 3시간 정도 된 관계일 뿐이었다. 남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남이었다.

“친구, 사이입니다.”

겨우 꺼낸 말이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그녀와의 관계를 자신할 수 없었다.

“린이 남은 수명이 얼마라고 말했나?”

“30일입니다.”

30일이라,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외출은 허락할 수 없다. 돌아가.”

린 본인의 동의가 있기에 간단히 될 줄 알았던 차인은 당황했다.

“본인이 나가고 싶어 하는 데 안 되는 건가요?”

“린이 너를 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녀가 얘기해서는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린의 말을 되뇌어봤다.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감각 때문인가요.”

“다시 한 번 말하지. 잘 들어.”

의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감각이 발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감각을 주도하는 신경세포-뉴런의 활성화다. 이 뉴런이 자극에 민감해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인간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첫 번째는 개인의 능력발전이라 말해볼까. 아무리 칼질이 서툰 인간도 시간이 지나면 능숙하게 칼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뉴런이 자신의 역할을 능숙히 해내게 되는 질적 성장이다. 두 번째는 반대로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 한 명의 시야보다 두 명의 시야가 더 넓은 것처럼, 한 명의 두뇌보다 두 명의 두뇌가 더 명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분담할 수 있는 뉴런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지.”

“즉 린은 뉴런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다거나 더 뛰어나다는 말입니까?”

“아니.”

즉답이었다.

“질적 성장은 인간이 아닌 세포라는 시점에서 불가능하다. 세포는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니까. 양적 성장이라는 것은 가능은 해. 다만 인간의 신체가 수용 가능한 세포의 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론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버리지. 이미 너도 본 적이 있을 거야. ‘암세포’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양적 성장이라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럼 대체 뭐 때문입니까.”

“보채지 말고 잘 들어, 두 번은 말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앞의 두 예시가 뉴런의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춘 거였다면 이건 유통과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뉴런이 받아들인 감각은 시냅스를 통해 전달되지. 컨테이너 벨트에서 일하는 인간을 생각해. 만약 컨테이너 벨트의 속도가 빨라진다면 생산속도는 어떻게 될까.”

“더 빨라지겠죠.”

“그래, 생산속도와 전달속도는 비례한다. 생산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 빨리 일하는 수 밖에 없어. 그만큼 에너지 소비가 많아지고 결국 지치는 속도도 빨라지게 되면 금방 다른 인간으로 대체 돼. 세포도 마찬가지다. 시냅스를 통한 전달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져, 그에 맞춰 감각을 전달하는 뉴런은 에너지를 빨리 소모하게 되고 곧 새로운 뉴런으로 교체된다. 인간의 생에서 생산되는 세포 수는 제한되어 있지만, 린의 경우 세포의 생산주기가 짧다. 그만큼 그녀의 생명도 짧아진다는 거다. 그게 지금 린이 처한 상황이다.”

과학과는 연이 없는 차인이었지만 어떻게든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암세포’가 아닌 린의 상황이 더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차인의 말을 들은 의사는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전달속도가 빨라지면 생산속도가 빨라진다. 반대로 생산속도가 빨라져도 전달속도가 빨라지지. 뉴런이 생산하는 감각이 많아지는 만큼 세포주기가 짧아진다는 의미야. 그렇다면 생산하는 감각이 많아진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까?”

“그래. 린이 말한 30일이란 병원이란 환경에서 그녀의 감각을 제한시키는 것으로 나타낸 최대 수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거다. 나가는 순간 어떻게 될지 보증 못해.”

테이블에 팔을 올려 깍지를 낀 의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까 포기해라, 린.”

순간 차인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의사를 돌아봤다. 그가 미치지 않은 것이라면 답은 하나였다.

“옥상에서 듣고 있다는 말인가요?”

“적어도 병원 내의 모든 소리는 린에게 들리고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 잘 들어―그 소리는 린에게 한 말이었나.

그래서, 의사는 안경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너에겐 타인의 생명을 짊어질 용기가 있나? 처음 만난 상대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저는…….”

이 말 또한 린에게 들릴 거라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의사의 말을 들었을까. 어떤 심정으로 내 대답을 듣고 있을까. 이성과 감성이 뒤섞이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사고가 정지했다. 의사의 눈빛만이 날카롭게 꽂혔다.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럴 용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차인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의사에게 하는 말이면서, 린에게 전하는 사과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가서는 안 됐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려했던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에서 벗어났다.

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D-27 (火)

병원에서 도망친 이후 하릴없이 잠만 잤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한 방에서, 한 발짝도 밖을 나가지 않고 잠을 잤다.

너도. 죽어.

계속 꾸는 악몽이었다. 목매달고 죽었던 부모가 나타났다. 얼마 전 그를 두고 고향에서 자살한 부모. 이미 썩은 시체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역겨운 악취가 풍겼다. 시골치고는 이웃과의 왕래가 거의 전무한 곳이었다. 유서에는 단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너도. 죽어.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서로를 헐뜯으며 칼부림까지 오가던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차인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나란히 죽은걸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함께 죽었구나.

부모의 마지막을 보고 있자니 인생이 허무했다. 마지막만큼은 유서대로 죽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자살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린을 만났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고하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 린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자신이 방에 있다는 죄악감에 사로잡혔다. 한낱 겁쟁이에 불과한, 초라한 자신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자각하게 되었다.

만약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아졌을까.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면서 그녀처럼 웃는 게 가능했을까. 타인의 자살을 막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칠 수 있었을까.

린은 그를 구했다.

차인도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잠긴 문을 열었다…….

차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문을 잠갔었다. 하지만 옥상에 널어둔 빨래가 있었다는 말은 평소에는 잠그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즉, 내가 오는 걸 예상하고 잠갔다. 중요한 건 왜 잠갔냐는 거였다. 그녀는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잠긴 문을 열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네 녀석과 대화하는 사이에도 내 시간은 줄고 있는 걸?

그녀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

처음 만난 이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정말 도와줄 줄은 몰랐는걸.

의외라는 감정으로 표현한 기쁨이었다.

응, 늦어도 30일 안으로 내 소원을 이뤄줘야 해.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한 그녀의 소원에 길을 내비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의사가 말한 생명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생각했다. 책임이나 용기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죽을 운명이라고 믿었다. 보잘 것 없는 가치관이었다. 볼품없는 인생관이었다.

동반자잖아. 죽음에 가장 가까운 동반자.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차인을 구함과 동시에 그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랐다.

그녀가 보여준 모든 말과 행동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를 믿었다. 의지했다. 그리고 배반당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혼자 납득하고 혼자 받아들이고 혼자 거부당하며, 마지막은 혼자가 된다. 정작 자신의 감정은 최대한 감춘 채 살아 왔을 것이다.

차인은 되풀이하지 않겠다던 결심을 스스로 버려버렸다. 그녀를 버렸다.

“최악이잖아, 나.”

지금 돌아간들 매정하게 거절당할 수 있다.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헤어져서는 안 됐다. 일방적으로 끝내서는 안 됐다.
 

D-26 (水)

“이른 아침부터 왔네. 린이라면 호실에 있을 텐데. 문병?”

카운터를 정리하던 지연이 말을 걸었다. 병원을 뛰쳐나간 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듯 했다.

“아뇨, 린의 외출증 받으러 의사 선생님 만나러 왔습니다.”

“청춘이네, 청춘이야.”

“남은 거라곤 젊음 밖에 없어서요.”

일순 테이블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연은 서류를 테이블에 툭툭 치며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나이에 관련된 발언은 조심해야겠다.

“원장님이라면 환자 상담 중일거야. 30분 정도 있으면 지나갈 텐데 기다리겠니?”

“부탁할게요, 지연 누나.”

지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환자가 몇 시지?”

“11시에 예약환자가 있습니다. 캔슬 할 생각 마세요. 이미 한 번 캔슬 당한 환자니까요.”

“예약할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다른 병원에 가라고 얘기해. 여기는 일손이 부족해서 모든 환자에 대응할 수는 없다고.”

“당신이 TV보는 시간과 몰래 자는 시간만 줄이면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대기실에 앉아 30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정확히 의사가 조수와 함께 카운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변함없이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차인과 눈이 마주치자 의도적으로 눈을 피했다.

귀찮은 예감을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상담 기록이랑 특이사항 간호사에게 잘 얘기해둬. 나는 11시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복도를 지나쳐가는 의사의 뒷모습을 향해 류진이 외쳤다.

“그 전에 상담 신청한 분이 계시네요. 차인씨, 원장님 따라가시면 됩니다.”

“……류진 나는 네가 싫다.”

“예, 저도 당신이 싫습니다.”

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차인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외출증 받으러 왔습니다.”

“지난번에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받고 싶습니다.”

창가로 다가간 의사가 창문을 열었다. 붉게 물든 낙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 그대로 창틀에 기대어 차인을 돌아봤다. 담배를 꺼내 문다. 피우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게 아니면 타인의 생명을 짊어질 각오가 있다는 소린가?”

“예.”

차인의 단호함에 의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관점을 바꿔보도록 할까.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위적인 명제다. 너는 그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야.”

“본인의 의견을 존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라……그럼 묻지. 지금 그 본인은 어디에 있나. 왜 나타나지 않지?”

“그건…….”

차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가족이나 혈연, 혹은 보호자가 아닌 이상 활동이 제한된다는 건 린도 알거다. 하물며 나는 아직 ‘본인’으로부터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어. 지금 하는 말도 들릴 텐데 말이야.”

“그래도 그건,”

“나가. 린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담론이다.”

의사의 말을 반박할 여지가 없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나가기 전 차인은 의사를 향해 확실히 말했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날 린은 문병을 거부했다.
 

D-25 (木)

“들려? 린.”

오늘도 문병을 거부당했지만, 지연의 도움으로 린의 개인호실을 알아냈다.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문에 기대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 그 의사선생 바쁜 모양이던데, 의외로 일은 하시나 봐. 지연누나가 오늘은 하루 종일 바쁘다고 해서 쪽지만 남겨뒀어. 내일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가 안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도망쳐서 미안. 네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아니, 단순히 내가 겁쟁이였던 거지. 다시 이곳에 오는 것조차 큰 결심을 굳혀야할 만큼 두려웠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결심을 되새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구해줄게. 네가 날 구해줬듯, 전력을 다해서 구할게. 만약 의사선생이 허락 안 해주면 널 데리고 몰래 탈출이라도 할 테니까. 누구말대로 진짜 도둑질이 되겠지만.”

그는 웃었다. 문틈 너머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D-24 (金)

“끈질긴 건 류진 한 명으로 충분해.”

의사는 원장실에서 차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한층 깊어진 다크서클을 보니 오늘 새벽까지 환자를 수술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했다.

“빨리 끝내도록 해. 곧 TV 봐야할 시간이다.”

차라리 TV 때문에 초췌해진 모습이라 믿고 싶었다.

차인은 생각을 전했다. 하룻밤 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는 자살하려 했습니다. 뒤편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죠. 그녀를 만난 건 그때였습니다. 그녀가, 린이 이 병원 옥상에서 저를 구하기 위해 천을 휘두르고 있었죠. 천을 말아 글씨도 만들었더라구요.”

“이불커버가 부족했던 원인이 너였군.”

의사는 덤덤했다. 어쩌면 차인이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아하던 제 마음을 읽은 듯이 얘기했지만 지금은 정말 자신을 구해주길 바란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건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능한 부분이다.”

“알고 있습니다. 제게는 린을 구원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어주는 건 가능합니다. 이뤄주고 싶습니다.”

의사는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겼다.

“그 또한 이기적인 바람이다.”

“알고 있어.”

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눈시울이 붉게 물든 린이 차인의 옆에 섰다.

“이기적이지. 알아, 날 위해서 죽으려는 사람조차 못 죽게 막았는걸. 그래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살지 못한 몫만큼 더 살아줬으면 했어. 그렇게라도 기대려고 한 거야, 나약하니까.”

그녀는 채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눈물과 함께 흘러냈다.

“그래서 자살하지 못하겠더라.”

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어버렸어. 나처럼 자살하려는 남자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와 딴판이었어. 그때서야 깨달았지. 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그 남자의 솔직함에 내 인생을 걸자고 결심했어. 이대로라면 살아도 산 게 아닐 테니까.”

린은 차인을 마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눈가는 아직 젖어있었다.

“한 때는 결국 다를 바 없는 인간이구나, 단념했었는데……맡겨보려구. 내 남은 시간을 책임져줄 남자에게. 만약 남은 수명이 더 짧아진다하더라도 후회는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남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는 건 상대에게 책임을 강요할뿐더러 자신의 무책임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해.”

“그래, 그러니까 서로를 의지하고 나아갈 거야. 이게 내 결심이야.”

그녀가 차인의 손을 잡았다. 차인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의사의 입에 물린 담배만이 까딱까딱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깊은 한숨으로 침묵을 깬 건 의사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단, 몸에 이상이 있다고 여겨질 때면 우선적으로 병원에 말하고, 외출을 삼간다는 조건이다.”

“고마워.”

린은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지연의 호의로 코트를 빌려 입은 린은 차인과 손을 잡은 채 붉게 묽든 가로수 길을 걸었다.

“우리, 낙엽이랑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는 낙엽을 잡으려 허공에 손을 뻗는다.

“아마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쓰레기가 될 운명이었을 거야. 만나지 못한 우리는, 엇갈린 우리는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겠지.”

한 손으로 잡기 힘드네.

린은 볼을 부풀리며 잡히지 않는 낙엽에 짜증냈다.

“그래도 린이 날 발견해줬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야, 분명. 이 낙엽처럼.”

린의 머리에 떨어진 낙엽을 떼어내 건넨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옷가게로 차인을 끌고 갔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옷을 고르는 린의 모습은 행복해보였다.

“더 이상 사복 입는 날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이거 어때?”

검은색 터틀넥이었다.

“그거 남자 거 아냐?”

린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인다.

“주인장이 차니한테 절대로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 옷이야.”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걸 왜 사?”

“한 번 입어보지 그래. 분명 잘 어울린다는 둥, 배우를 닮았다는 둥 할 테니까.”

“그렇게 사람 놀리면 좋냐.”

“그럼, 좋지.”

내가 봐도 차니가 입으면 도둑놈처럼 보일 거 같아,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타인의 감정이 흘러들어온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렇게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너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은 것일까.

린이 차인의 코를 톡, 건드리고는 고개를 내젖는다.

“슬픈 생각하지 말기.”

일순 그녀의 눈빛이 슬픈 빛을 띠었다.

“그게 아니면 나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후 한참을 고민하다 붉은 목도리와 처음 린이 고른 터틀넥을 남녀 세트로 구매했다.

“진짜 사버렸네, 도둑놈 같은 옷. 이제 이걸 입고 락픽하면 영락없이 경찰서 행이겠는 걸.”

“락픽은,”

“예, 락픽은 건전한 스포츠네요~”

아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함께 붉게 물든 석양 아래를 걸어간다.

행복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과분한 행복이었다. 앞서 걸어가던 린이 석양을 등지고 차인을 바라본다. 붉게 물들어가는 그녀는 아름다운 색감을 띄었다. 적기를 맞은 단풍이었다. 손에 닿으면 떨어질 듯한 아름다움에 오히려 불안감이 일었다.

린을 부르려고 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쓰러졌다.
 

D-17 (金)

일주일동안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가을장마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자극에 근육경련이 일듯 놀란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는 주의를 요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과로(過勞), 기계는 과부하(過負荷). 쉬거나 고치면 재기 가능한 두 가지와 달리 세포는 재기 불가능해. 세포에게 과(過)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염두에 둬.”

린의 호실 앞에서 차인은 갈등했다.

그의 행동이 린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그 의미가 뼈에 사무치도록 무서웠다. 차라리 린을 병원에 가만히 두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이 아닐까 생각할 때였다.

문이 열리고, 얼굴이 상기된 린이 보였다. 그녀는 어정쩡하게 서있는 차인의 손목을 붙잡고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가 뭐라 말하던 그녀는 비를 맞으며 거친 발걸음을 묵묵히 옮겨갔다.

도착한 곳은 선술집이었다.

린이 들어가려하자 차인이 막아 세웠다.

“무슨 짓이야? 갑자기 술이라니. 아직 안정을 취해야할 때잖아. 일단 비를 피하자.”

“미리 죽을 사람 추모한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차인의 팔을 내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했지, 슬픈 생각은 하지 말자고. 내가 바라는 게 그런 일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이별을 먼저 생각하는 거야? 단지 생명만 연장하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건, 그런 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잖아.”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는지 몰랐다. 차인의 말도 거칠어졌다.

“린, 생각이야. 생각만 한 거라고. 어쩔 수 없잖아. 떠오르는 이미지를 내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왜 너는 내 생각을 엿보고 그걸로 단정 짓는 건데? 아직 하지 않은 행동을 가지고 대체 왜 내가 비판을 받아야하는 거냐고.”

“그럼 어떡해…….”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 떨어질 듯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와.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안 돼. 사람들의 시선과 행동, 말소리나 생각 따위가 지금도 느껴져.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써봐도 무리라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빗물과 섞여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쩌면 되는 거야……?”

그녀는 양 팔로 자신을 감싸며 떨고 있었다. 추위일지 모른다. 혼자 남게 된다는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주저앉을 듯한 린을 감싸안으며,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파묻었다.

“미안해.”

그녀는 차인에게 기대어 절규했다.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쏟아냈다. 빗속에서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D-14 (月)

흐린 날이었지만 주말동안 계속 내리던 비는 멎었다. 오늘은 린을 데리고 그의 방에 가는 날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했을 때, 린은 눈을 흘기며 이불로 몸을 가렸다.

“변태.”

“아냐, 아니라고. 나는 청렴결백해. 린이 말했잖아. 가장 조용한 곳에 데려가 달라고. 내가 아는 선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야, 내가 사는 곳.”

“지금 머릿속에 날 가지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우와, 잠깐만 진짜 그만해. 완전 부끄러우니까.”

“네가 그러니까 저절로 상상이 되는 걸 어쩌라고. 아, 몰라. 상상할거야.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볼 테다.”

“진짜 그만해, 저질아.”

린이 전력으로 휘두른 베개가 안면을 강타했다.

볼품없는 방이었다. 린을 데리고 오기 전에 정리도 하고 난방을 틀어놨지만, 집과 같은 안락함도 따스한 온기도 그리움도 무엇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최소한의 생계만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살기 위해 머무는 공간이었다.

“그렇지 않아.”

린은 단박에 부정했다.

“중요한 건 차니가 이곳에 산다는 거야.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그의 방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그의 자취를 하나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취를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해서.

“밥 먹어야지, 기다리고 있을래? 장 보고 올게.”

“같이 가. 난 괜찮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차니랑 같이 있는 걸로 충분한걸.”

아, 또 야한 생각했지, 변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차인을 놀리며 손을 잡았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직접 요리하는 거야?”

“그렇게 놀라도 가슴이 아픈데. 간단하게는 해먹는다고, 날 뭐라 생각한 거야.”

린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죽음동반자, 자살 지원자, 도둑놈, 변태, 저질, 호색한.”

기운이 빠졌다. 허탈한 웃음만 흘렸다.

“좋은 뜻은 하나도 없구먼. 그보다 마지막은 다 같은 의미잖아.”

“그렇게 생각해?”

길을 걷던 중 린이 뒤에서 차인을 껴안았더니 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설령 그대가 변태, 저질, 호색한에 내 마음을 훔친 도둑놈일지라도 자살을 지원했던 죽음 동반자로써 나의 옆에 있어주는 그대가 저는 좋습니다. 부족한 나를 지탱해주는 그대가 저는 좋습니다.”

“……이건 무슨 플레이야?”

린은 웃음을 터트리며 앞서 걸어갔다.

“내 진심. 봐봐, 충분히 좋은 의미잖아.”

사실 갑작스럽게 껴안은 것과 귀에 대고 속삭이는 상황에 놀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직 린의 온기가 귓가에 남아있는 듯 했다.

“자, 잠깐만 한 번만 더 말해줘.”

“싫네요~”

양 손을 뒤로 모으고 허리를 숙인 린이 혓바닥을 내민다.

“대충 짜깁기해서 말한 거 아냐?”

“숙녀는 결코 가볍게 말하지 않는 법이야.”

“아니면 한 번만 더 껴안아줘.”

“변태.”

“변태라도 좋으니까.”

“다가오지 마, 변태야. 아, 또 이상한 상상하기 시작했지.”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 마트에 도착했다. 점심대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꽤 붐볐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린이 먼저 말했다.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어류 쪽으로 이동했다. 주 요리는 된장찌개에 고등어구이로, 집밥처럼 느껴진다고 린은 좋아했다.

푸른빛이 진하고, 싱싱해 보이는 녀석을 한 마리 골라 바구니에 담고 된장찌개 재료를 사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통로에 설치된 시식코너를 보며 린이 말했다.

반대편 아주머니를 향해서 다시 말한다.

“그런 건 아니에요.”

예의바른 그녀의 행동에 정작 시식코너 아주머니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린과 차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비 오는 날 있었던 린의 증상을 의사에게 말했었다.

“생각을 실재(實在)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생각해. 타인의 생각이라면 망상(妄想)에 훨씬 가깝지. 인간은 이 허상을 육체란 필터를 통해 구체화시킨다. 그 말은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허상이 재정립되고 논리정연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 만약 구체화 되지 않은 수십 개의 허상을 동시다발적으로 자각한다면, 그때는 린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해.”

이상행동이 나타나면 병원으로 올 수 있도록 해, 가능한 빨리.

숨을 삼켰다.

“린, 가자.”

이 상태로는 위험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린.”

“나는 괜찮아. 아직 우리 재료를 다 사지도,”

“린!”

소리쳤다.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린의 두 어깨를 꽉 잡고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쳤다. 한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차인을 보며 실소를 머금는다.

“……나 심각하구나. 혹시 지금도 말하고 있어?”

차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지, 계속 들린다. 차니의 목소리가 뇌에서 울려.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 큰일이다, 정말…….”

차인은 린을 업고 마트를 벗어났다. 병원으로 가야했다. 의사를 만나야했다.

“차니는 진짜지?”

“진짜야.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 내가 진짜야.”

“미안해.”

“사과하지 마. 사과할 필요 없어. 그냥 나만 생각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생각해.”

“응, 그럴게.”

린이 정신을 잃었다는 건 병원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차인의 등은 그녀의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D-

“컷다운(Cut down) 현상이라 생각해. 간단히 말해 차단기가 내려갔다는 거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특정 뇌파가 비정상적으로…….”

“도시락 드시겠어요? 당신마저 그렇게 쳐져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지. 그건 린도 마찬가지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조차 흐릿했다. 누군가 말을 걸었고 무엇인가를 먹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차인은 병실에 누워있는 린의 옆에서 그녀가 일어나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몇 가지는 구체적인 계획도 완성된 상태였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종이는 이미 열 페이지를 넘어갔다.

둘이서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해봤다. 함께 놀이공원에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서 평범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린의 손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D-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았다.

“안녕.”

그녀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마치 어제도 만난 사람에게 인사를 하듯 자연스러웠다. 차인은 린을 부둥켜안았다.

“몰골이 말이 아니잖아, 진짜 도둑놈 같아.”

아하하,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예전처럼 밝고 명랑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서로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린이 일어난다면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둬.

그 순간 왜 의사의 말이 떠올랐을까. 그는 담담히 사실만을 전달했다. 냉정한 그의 행동에 화가 났었다. 분노했고, 증오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미워하지 마. 사실 의사선생은 나도 싫지만. 정확히 사실만을 끄집어낸다는 것도 싫지만, 정작 자신은 겉과 속이 정반대인 사람. 순 거짓말쟁이야.”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둬, 차니.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겠다.”

납득할 수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그녀의 행동은 조금씩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린은 버킷리스트를 보며 감탄했다.

“내가 그렇게 많이 잤어? 피부 엄청 좋아졌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 정말 한 게 없구나. 함께 밥 먹은 적도 없었던 건 충격인데. 아, 잠깐만…….”

그녀는 볼펜으로 버킷리스트 마지막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차인이 보려고 하자 황급히 종이를 가린다.

“그보다 나 가고 싶은 곳 있는데.”

급히 화제를 돌린 그녀는 창문 너머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처음 차인이 자살하려고 올라간 아파트였다.

“보고 싶어. 차니가 봤던 풍경을, 그날 우리의 만남을 다시 보고 싶어.”

만약 지금 의사를 만난다면, 린이 깨어났다는 걸 알게 된다면 밖으로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린과 몰래 빠져나가기로 했다. 차인은 옷가게에서 샀던 붉은 목도리를 린에게 감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린은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아……혹시 업어줄 수 있어?”

그녀는 팔을 뻗어 차인의 등에 업혔다.

“무겁다고 생각하지 마. 그치, 가볍다고 생각하는 거야. 맞아, 가벼워.”

카운터를 지나야하는 상황에서 사실 몰래 빠져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싫다, 다들. ……진짜 싫어.”

린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꾹 참았다.

아무도 없었다. 마치 린과 차인이 지나갈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카운터도, 대기실도 비어있었다.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이라도 통하는 것처럼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옥상에 도착했지만 문은 다시금 잠겨있었다.

“나 그거 해보고 싶었어, 도둑질. 알았어. 건전한 스포츠인 락픽.”

린을 뒤에서 지탱하며 그녀가 락픽으로 문을 여는 걸 도왔다. 겹쳐 잡은 두 손이 같이 움직였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떨림을 애써 무시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린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연거야. 아, 저기 병원 보인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멀구나.”

빗물을 머금은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다. 차인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으려하자 고개를 내젖는다. 그녀는 천천히 한발 한발 움직여 스스로의 힘으로 차인과 마주섰다.

“이제 손으로 내 귀를 막아봐.”

차인이 양 손을 뻗어 그녀의 두 귀를 막았다.

“좋아, 그렇게 있어.”

그녀도 양 손으로 차인의 귀를 막더니, 키스를 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롯이 둘 만의 숨소리가 세계를 가득 채웠다. 세계에 둘만이 남겨진 듯 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붙어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곳. 드디어 올 수 있었다.”

린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내 첫키스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먼저 떠나도 용서해 줄 거지?”

사랑해.

그녀의 마지막 말은 갑자기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묻혀버렸다.

차인은 무릎을 꿇고 오열을 터트렸다.
 

버킷리스트

린에게 어울리는 옷 사기

마트에서 장보기

함께 요리하기

로맨스 영화보기

비싼 레스토랑에서 외식하기

린이 가고 싶은 해외로 여행가기

놀이공원 가기

동물원 가기

술집에서 술 마시기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기

도시락 만들어서 소풍가기

옥상에서 야경 바라보기

함께 집 꾸미기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기

………………

……………

…………

혼자서도 꿋꿋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나에 대해 잊기

가끔은 나에 대해 떠올려주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