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투명함’이 불러올 괴의한 사회
[장산곶매] ‘투명함’이 불러올 괴의한 사회
  • 한소연 편집국장
  • 승인 2017.05.21
  • 호수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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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소연<편집국장>

“드라마 시청률이 40%가 넘는 게 잔치인 양 비춰지는데, 사실 좀 소름돋지 않아요?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게 얼마나 무서워요.”
1년 전, 필자가 직접 인터뷰했던 ‘72초 TV’의 진경환 크리에이터가 한 말이다. 그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감정이 다를 텐데 수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무섭다고 했다. 획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투명함’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화두이다. 투명함은 곧 공정함을 상징한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얻고 민주주의적 효율성을 낳는다. 허나 모순적이게도 투명함이 파시즘의 전제가 된다. 즉, 민주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전체주의 혹은 독재의 근본이 투명성에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해야 한다. 이 양상은 SNS의 발달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인, 연예인은 물론이거니와 공인이 아닌 개인도 SNS를 통해 일상의 내밀한 부분까지 송출한다. 드러내는 행위엔 타인의 평가가 필연적이다. 노출함으로써 검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부정적인 영역은 배제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면만을 방출하기 때문에 그 양상은 하나의 가치로 수렴되기 쉽다. 알다시피, ‘획일함’은 타자와의 이질적임을 제거해야 유지된다. 다름이라는 것은 너무나 걸리적거려, 순환을 원활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름’을 부정하는 획일성이 투명함에 내재돼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속 요구되는 투명함은 비민주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점점 현대사회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돼 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긍정적임을 드러내는 긍정사회가 된다. 이 사회는 걸리적거림이 없다. 모든 것이 원활하고, 부정성이 없어 통제가 쉽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지 않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온 것도 이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좋아요’의 긍정은 부정성을 제거하며 사고를 원활하게 한다. 이에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에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그러나 ‘싫어요’라는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를 줘 그것을 손상시킨다”며 “따라서 획일적이고 긍정적인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외치는 ‘투명함의 요구’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누르는 ‘좋아요’는 앞서 말한 시청률 40%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상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는다. 획일화라는 결과는 재앙이다. 자신과는 다른 이에게 조롱 섞인 어투로 ‘아웃사이더’라 부르는,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 인색한 우리는 결국 민주적인 독재국가라는 괴의한 사회를 맞이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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