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5.18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 한대신문
  • 승인 2017.05.20
  • 호수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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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제정 운동과 함께 알아본 16년간의 대장정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집권하면서 시민들은 오랜 기간 이어져온 군사정권의 종식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진압(이하 5.18진압)의 참상을 규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에 문민정부는 1995년 5.13 특별담화를 통해 입장을 밝혔지만 정작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넘어가버렸다. 그리곤 굳이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춰 갈등을 재연하지말자며 미온적 태도를 드러냈다. 이러한 문민정부의 의사는 검찰의 5.18 진압에 대한 처리에서 그대로 반영됐다. 5.18 진압에 대한 고소·고발이 빗발쳤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처분(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것이다.

5.18특별법 제정 운동의 신호탄
1995년 7월 18일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 직후 기소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범국민적 성명운동이 나타났다. 이는 재야, 대학생, 진보단체, 노동계 등에 국한되지 않고 의사, 변호사, 성직자에까지 퍼져나갔다. 특히 여론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교수·언론인·의원이 운동에 동참하는 등 각계각층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며 거대한 반향이 일어난 것이다.
범국민적 투쟁에도 문민정부는 단호했다. 9월 25일, 민자당 김윤환 대표위원이 “특별법 서명 운동에 당원의 개인 차원의 서명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며 사실상 특별법 제정에 대한 반대의사를 보였다. 여기에는 3당 합당으로 5·6공화국과 손을 잡으며 집권할 수 있었던 문민정부의 태생적 한계가 작용했다.
그러나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촉발된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3개월 만에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4천억 원의 비자금이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 이후 ‘6공화국 비리 척결’, ‘노태우 구속’ 등이 새로운 의제로 추가되며 책임자 처벌을 줄곧 주창했던 특별법 제정 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10월 27일 노 전 대통령은 “통치자금은 정계의 오랜 관행이었지만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며 기업인들로부터 비자금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이에 더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며 특별법 제정 운동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1월 16일, 노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고, 11월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여당에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것이다.
그동안 시민사회를 위시로 한 각계각층의 집단행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정부가 입장을 바꾸게 된 정치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우선, 문민정부의 선거 자금 문제가 불거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자 당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총재도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수수했다”고 시인했다. 문제는 그가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자금 문제도 분명히 밝혀야한다”고 주장하며 문민정부의 선거 자금 출처 문제로 불똥이 튀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민자당 내부에서는 김영삼 계열과 민정당 계열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결국 문민정부는 쿠데타 세력을 처벌해 정국 주도권과 대선 자금 문제를 일거에 처리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 카드를 선택했다.
둘째,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맞게 5공 세력과 단절하고 과거를 청산해 민심의 지지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5.18특별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재균 전 국회의원은 “이미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정부는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상황이었다”며 “정권 말기에 레임덕 현상마저 보이자 여론을 수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남으로써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의도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별법 제정 선언 이후: 산적한 과제들
11월 24일, 시민사회가 염원하던 특별법 제정에 여야가 합의했지만 해결해야할 법적 과제들이 산적해있었다. 우선, 같은 해 7월 검찰의 불기소처분 결정에 분노했던 시민들이 이를 취소해달라고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한 헌재의 최종결정은 11월 30일에 예고됐었다. 그러나 11월 28일, 헌재가 검찰의 불기소처분 자체는 부당하지만 신군부 세력이 1980년에 벌인 5.18 진압은 공소시효 15년이 지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대로라면 공소시효가 완성돼 5.18 진압 세력에 대한 사법적 처리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청구인들은 판결 하루 전에 헌법소원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검찰은 스스로의 모순적 행태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에 직면했다. 본래 검찰은 12.12사태(이하 12.12)와 5.18진압을 따로 수사해왔다. 먼저 12.12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하지만 ‘과거사가 재론되는 등 국가분열을 재연함으로써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후 5.18 진압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론’을 내세우며 불기소 처분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민적 여론이 거세지고 대통령이 특별법 제정 의지를 밝히자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스스로 5.18 진압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며 공소권이 없다고 선언했으나 불과 4개월 만에 기존 결정을 번복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12.12와 5.18진압을 같은 사건으로 해석했다. 홍은택 전<신동아> 기자는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기에 재수사할 여지가 있는 12.12에 5.18진압을 함께 묶어 처리했다”며 “이는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조차 몇 개월 만에 뒤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기 모순적 행태를 어렵사리 합리화한 끝에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반란수괴 혐의로 구속됐다.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 마침내 실현되다
12월 21일,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등 여야 3당의 합의로 시민들이 염원했던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은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 관련자에 대한 공소시효가 1993년 2월 24일(노 전 대통령 임기종료일)까지 정지되도록 했다. 당시 전‧노 전 대통령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국가의 *소추권 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공소시효 정지 조항으로 인해 시민사회는 그들을 처벌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한편, 12.12 및 5.18진압에 관계된 핵심관련자뿐만 아니라 단순가담자에 대해서도 공소시효를 정지시켜 검찰이 이들에 대한 기소여부를 최종 판단하도록 했다. 또한 특별법 4조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위로 인해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특별재심’도 규정했다. 같은 날, 5.18특별법과 함께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헌정범죄시효법)도 제정됐다. 5.18특별법이 과거의 12.12와 5.18진압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의 진행을 정지시키는 특별법이었다면, 헌정범죄시효법은 미래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집단살해죄에 공소시효를 일절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특례법이다.
이영재<공공정책대학원 시민사회학과> 교수는 두 법에 대해 “미래 민주헌정질서의 규범 확립에 법제도적 안전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과거의 사건뿐만 아니라 향후 헌정질서 파괴행위까지 제재함으로써 불법‧무력적 쿠데타로 인한 민주질서의 퇴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는 것이다.

‘특별법 제정 운동’이라는 소중한 경험
검찰의 불기소처분 결정으로 촉발된 범국민적 5.18특별법 제정 운동은 분명 시민들의 힘만으로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박계동 의원의 폭로나 민자당 내부의 갈등을 비롯해 다양한 상황들이 맞물리며 특별법 제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운동이 없었다면 문민정부가 5.18 후속처리에 보였던 미온적 태도의 급격한 전환도, 보수대연합이라 불리던 민자당의 균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권위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경험을 심어주었다. ‘특별법 제정 운동’이라는 소중한 경험은 탈권위적 사회로 갈 수 있는 추동력이 됐다.


 * 소추: 형사 사건에 대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하는 일

도움: 김지하 수습기자 jihaaa1019@hanyang.ac.kr
이영재<공공정책대학원 시민사회학과> 교수
참고문헌: 김재균(2010). 5.18과 한국정치: 광주보상법과 5.18특별법 결정과정 연구. 파주:에코미디어
이영재(2004).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5.18사법적 처리의 의의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4(2), 242-268
이영재(2015).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5.18특별법. 민주주의와 인권. 15(3), 80-111
정호기(2015). ‘5월 문제’의 해결과 가해자의 사법적 처리. 민주주의와 인권, 15(3), 41-78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1995.12.21. 법률 제5029호)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1995.12.21. 법률 제 50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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