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날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합니다
  • 김성재 기자
  • 승인 2017.05.13
  • 호수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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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당시 사진

 

5.18 민주화 운동, 그날
980년 5월 나는 그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해. 그 날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군인들은 집에 총알을 퍼부었어.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 사실을 광주 밖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내가 처음 이 얘기를 했을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 너도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래?

1980년 5월 17일부터 27일까지의 일기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어. 다른 대학생들은 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했어.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종일 집 안에만 있었지. 너무 무서워.

<5월 18일부터 19일>
시내에 들이닥친 공수부대는 “전두환 하야하라”를 외치는 시위대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폭행했어. 시민들은 분노해 파출소에 불을 질렀어. 아버지도 피를 흘리시며 집으로 들어오셨는데 깜짝 놀랐어.

<5월 21일부터 25일>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와 광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나도 가족들 몰래 그곳에 갔었지. 내가 도착했을 땐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1절이 끝나자 공수부대는 약속한 듯이 총을 쏘기 시작했어.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군인들이 총을 쏘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지.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총을 들었어. 사람들은 나주, 화순, 함평, 담양 등지의 예비군 훈련장 무기고로 달려가 총을 구해왔어.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어. 하지만 시민들은 열세 속에서 끝까지 계엄군에게 맞서 싸웠어. 21일 밤 계엄군이 철수하자 사람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항쟁지도부를 만들고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어. 다음날부터는 항쟁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어.

<5월 26일>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는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내로 진압하기 시작했어. 죽음을 각오한 시민대표들과 종교인들은 전라남도 도청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죽음의 행진을 결행했지. 공수부대가 최후통첩을 보내왔고 어른들은 고등학생과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냈지.

<5월 27일>
마침내 새벽 탱크 소리와 총소리가 광주의 밤하늘을 메웠어. 시민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끌려갔어. 지난 10일 동안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어. 무서워,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치거나 어디론가 사라졌어. 다들 살아있는 걸까? 제발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 이 내용은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 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여성, 목숨을 건 투쟁

항쟁 속 여성의 모습을 기억해보다
영화 「화려한 휴가」 속에서 여자 주인공 신애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가두방송을 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진다. 민중항쟁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당시 민중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안성례<오월어머니집> 前 관장은 “우리가 총칼을 들고 싸우진 않았어도 밥 나르고 부상자 치료하고 참여를 호소했다. 시민군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여성들의 힘이었지만 영화 속에 그런 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며 여성의 역할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음에 아쉬움을 표했다.
실제로 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여성들 역시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 소식을 듣고 가두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시내 곳곳에 흩어져 계엄군과 함께 돌을 던지기도 하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언론과 방송이 차단되자, 고립된 광주에서 정확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선전, 홍보 활동에 필요한 자료와 자금을 제공했다. 이후 계속해서 계엄군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자 여성들은 시신 수습에도 앞장섰다. 시내에서 부족한 관을 시외로 나가 사왔고, 시신에 옷을 입히는 염을 하는 등의 일들을 도맡아 했다.
공수부대가 전라남도 도청에서 철수한 이후, 여성들은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했다. 당시 궐기대회를 주도했던 한 여성은 “남성들이 하라, 마라 해서 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다 내용 만들어서 대자보 쓰고, 궐기대회 준비하고 그랬어요”라며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고 도청 내 시민군과 항쟁지도부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항쟁 초기부터 마지막 27일까지는 동네별로 밥을 지어 건네주고 조를 구성해 취사를 담당했다. 당시 계엄군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했다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총만 들지 않았을 뿐,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에 대해 안진<광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당시 여성들의 활동은 시민들 사이에 연대감을 형성하고 항쟁을 계속하게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항쟁 속 여성들의 역할은 무기를 들고 맞선 사람들 못지않게 중요했다.


항쟁 이후,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한 활동 
민중항쟁 이후 가족을 잃었던 이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온몸에 열한 발의 총탄을 맞아 사망한 김춘례 씨의 어머니 박순임 씨, 아들의 시체를 보고 실신한 후 다음 해 사망한 어머니 박난초 씨, 계엄군의 폭행으로 정신 이상이 돼 후유증으로 87년 10월 사망한 장경희 씨 등 당시의 충격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트라우마가 그녀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수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트라우마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부상자 지원활동과 민중항쟁에 참여해 체포‧구속된 시민들을 돕기 위해 결집했다. 당시 활동에 참여했던 노영숙<오월어머니집> 관장은 “자국민을 총으로 쏘는 것을 본 후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며 “국가에 의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구속자 가족들은 ‘5.18 구속자가족’ 단체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민중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군사 재판이 끝나고 나서도 구속자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계속해서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의 남겨진 가족을 위한 경제지원 등 많은 활동을 했다. 1982년 12월에 5.18 관련 구속자가 모두 석방된 후,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뒤 활동영역의 폭을 전국 차원으로 확장해 한국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이들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날조된 5.18의 진실을 종이에 직접 작성해, 국내외 각종 단체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5.18 구속자가족’ 단체는 ‘오월여성회’라는 조직으로 재결집하고 이후 ‘오월어머니회’로 개명한다. 이들은 ‘오월어머니집’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한국 전쟁 피해 가족들과 부산·마산 사태 가족들, 그리고 세월호 생존자들을 만나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데 힘쓴다. 더불어 항쟁 속 여성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후속 세대에게 전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민중항쟁과 여성, 우리의 기억
민중항쟁 이후 여성의 역할과 업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항쟁의 역사기록에서 배제됐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민중항쟁 이후 진상규명 및 피해자 보상이 남성의 활동 중심으로 이뤄졌다. 5.18 관련 단체는 남성들이 주를 이뤄 활동했고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광주전남여성단체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이후 5.18 관련 역사 서술을 위한 조사에서 배제됐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로 당시 사회는 여성이 담당하였던 업무를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만연했다. 물품준비, 취사활동, 시체 염하는 것은 항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업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인식 속에서 여성은 자신들의 역할을 사소한 것으로 인식했다.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역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셋째로 여성이 운동과정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밝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여성 스스로가 직접적으로 투쟁을 한 남성에 비해 보잘것없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를 보면 당시 여성들의 나눔, 연대 정신은 시민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원동력이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간 동안 어쩌면 우리는 민중항쟁을 무기를 들고 싸우는 남성중심의 역사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총만 들지 않았을 뿐 남성과 동등하게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5.18을 앞둔 이 시점에서 민중항쟁 당시 여성의 역할과 행동에 대한 재평가와 숙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도움: 노영숙<오월어머니집> 관장
사진 출처: http://filmage.kr/board/board.php?bo_table=free&wr_id=71
참고 문헌: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 여성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 후마니타스. 2012
안진. 5·18 광주항쟁에서 여성 주체들의 특성. 2007
노영숙. 오월어머니집 형성에 관한 연구 : 5.18 이후 오월어머니회 활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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