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이 기억을 테크놀로지에 기대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구어’의 시대를 지나 ‘문자’라는 매체가 등장하며 시작된 인간의 이러한 행태는 전자매체로 인해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니콜라스 카는 그의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간이 인터넷을 통해 기억을 ‘아웃소싱’하고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이 기억을 테크놀로지에 아웃소싱하게 되면서 집중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고, 망각에는 익숙해져간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를 시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기억과 문화의 흥망성쇠와 연결한 카의 주장은 문화와 상상력을 연결한 유발 하라리의 견해와도 결이 맞는다.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현존 인류인 사피엔스의 생존 동력으로 그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집단적 상상, 즉 ‘상상의 질서’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상상의 힘이 결속력을 강하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의 주장을 연결해보면, 기억의 아웃소싱은 상상력의 빈곤으로 이어지며, 이는 문화를 쇠락시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기억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다시 수십 년 전처럼 스마트폰은 멀리 하고, 지인들 전화번호 20여개 정도는 외우면서 암기를 미덕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기억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는 기억 그 자체를 대신한다고 하기 보다는 기억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기억이란 원래 단순히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인데,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몸을 쓰지 않고도 간편하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직접 부딪히지 않고도 간접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많아진다. 그 결과,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한 기억과 경험의 양과 질은 부실하기 짝이 없으며, 그것에 뿌리를 두고 맺히는 상상력 또한 궁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접 보고, 몸으로 부딪히며 깨달은 생생한 체험을 늘려가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기대면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러한 매력에 빠져 흥얼거리고만 있다가는 물이 끓어오르는 줄도 모르고 헤엄치다 죽게 되는 솥 안의 개구리처럼 되기 십상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직접 보고, 손으로 뒤집고 엎으며, 이것저것 엮어 가야한다. 이를 통해 생동감 있는 기억을 몸에 새겨 상상력으로 이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인류의 생존, 더 나아가 문화라는 이름의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는 시작점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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