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로]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진사로]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이수용<대외협력팀> 과장
  • 승인 2016.04.03
  • 호수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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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대외협력팀> 과장
2016년 1월 4일,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첫 월요일. 오랜 기간 한양을 위해 동고동락 해왔던 어느 선배 직원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직장에서는 역량 있는 과장으로서, 가정에서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왔던 그 분의 죽음 앞에 많은 교직원들이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세상에 슬프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 죽음의 주인공과의 친밀도에 비례하여, 그 주인공의 나이에 반비례하여 ‘슬픔의 강도’는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슬픔의 강도가 높은 죽음일수록 남아있는 자들에게 평소 잊고 지내 온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된다.
 현대인들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경주마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물며 경쟁을 ‘미덕’으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가.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빨리 승진하기 위해,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끊임없는 경주에 내몰린다. 하지만 현재의 행복을 담보로 한 채 이러한 맹목적 경주를 벌이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를 필요로 한다. 바로 ‘나는 적절한 나이(평균수명)까지 살다가 갈 것이다’라는 전제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어린 학생들의 비극적 죽음에 늘 빠지지 않는 희생자 부모들의 인터뷰에는 항상 가슴 아픈 회한이 있다. 바로 “이럴 줄 알았더라면…”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공부 안 한다고 매일 혼내지 말 걸…,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게 놔둘 걸…” 모든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여 그랬다지만, 아이들로서는 가져보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그 짧은 인생의 조그만 행복마저 포기해야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예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긴 삶’을 부여받은 우리들 역시 불확실한 그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행복들을 포기하고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들과,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꺼 놓은 채 눈앞에 닥친 이익과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좇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흔한 ‘Memento Mori’라는 라틴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 역시 반드시 죽는다.’라는 전제 앞에서 지금의 삶을 돌아봤을 때 한 치의 부끄러움과 아쉬움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렇듯 ‘죽음’이라는 필연적 존재는 삶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깨우쳐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인생 뭐 있어?’ 식의 허무주의에 젖게 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균형감각을 찾기 위해서는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라. (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라는 말을 되새겨 볼 일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노력하되, 주어진 순간순간에는 짧은 호흡으로 후회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화창한 봄날에 한대신문에서 ‘죽음’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아 겸연쩍은 마음이다. 하지만 밤이 있어 낮이 더욱 활기차고, 어둠이 있어 빛이 더욱 눈부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죽음이라는 반대급부가 있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쪼록 한양 가족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故 신해철 님의 노래 가사와 함께 짧은 글을 맺고자 한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 대답할 수 있나 /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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