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 그 사이의 SF
현실과 환상, 그 사이의 SF
  • 이영재 기자, 한소연 기자
  • 승인 2016.03.12
  • 호수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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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지구해양과학과 85학번인 박상준<서울 SF아카이브> 대표(이하 박 대표)는 SF 및 교양 과학 전문 기획 번역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장르 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초대 편집장과 SF 전문 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지냈으며, 『화씨 451』, 『라마와의 랑데부』 등의 번역서와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상대성 이론, 그 후 100년』 등의 공저를 포함해 30여 권의 SF 책을 냈다. 지금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SF 자료들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모아놓거나 분류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공덕역 서울SF아카이브 사무실 밑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 박상준<서울 SF아카이브> 대표

 

어렸을 때부터 아동용으로 축약 편집된 SF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박 대표는 천문학을 전공하는 사촌의 집에서 처음 어른용으로 완역된 두꺼운 SF 책을 읽었다고 한다. 기묘한 외계인, 초능력자, 통속적인 액션, 공포 등 아동용 SF 책의 내용과는 다른 인간의 진화와 미래에 대한 장대한 비전, 전망이 담겨있는 SF 책을 읽고 그는 심오한 SF 세계에 빠졌다. 어려서부터 SF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SF계에서 종사하는 그가 생각하는 SF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영국의 ‘브라이언 올디스(Brian Aldiss)’라는 소설가가 했던 말이 있어요. “SF는 인간 스스로가 계속 확장시키고 있는 지식 체계 속 우주에서 우리 인간이 어떤 위치고, 어떤 존재인지 정의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굉장히 좋아해요. 이와 비슷하게 제가 말하고 싶은 SF의 정의는 ‘시공간적인 시야를 확장하게 하는 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진화하는 과학기술로 인해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시공간적인 시야의 확장을 하며 경이로움을 느끼죠.” 덧붙여 그는 SF가 아이디어의 유희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SF의 대표적인 미덕으로 꼽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은 엄밀히 말하자면 시적 감동이다. 과학기술의 미래가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세계상, 그리고 SF적 상상력이 형상화할 수 있는 다른 세계와 생각이 그런 시적 감동의 차원에서 이야기와 융합되어 구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SF 작품은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용되었는데요,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의 모습에 대해 함축적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인간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근본적인 양심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죠.” 

△ 재미있는 과학 모험 이야기(아동문고)

 

아카이브(Archives); 정보 창고
박 대표는 서울SF아카이브의 대표이다. 그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SF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1980년대 이전의 한글로 된 한국 SF 자료들을 따로 정리해서 체계적으로 모아놓거나 분류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SF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장르의 SF 자료들을 기회가 닿는 대로 모았어요. 아무도 하지 않아서 잊혀지고 사라지기 전에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박 대표는 2007년도에 한국 SF 100년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전시회 컨셉을 정할 때 “한글로 된 최초의 SF 자료가 뭔지 찾아보니 1907년에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가 『해저여행기담』으로 번역이 된 적이 있었어요. 동경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태극학보’라는 번역 잡지에서 연재한 것인데, 확인한 바로는 가장 오래된 한글로 된 과학 SF 자료였어요. 그 이후로 1907년부터 2007년까지 100년 동안의 한국 SF 자료를 전시하게 된거죠.” 박 대표로부터 모아지는 한국 SF 자료들 덕분에 한국 SF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SF 공부에 어려움은 없었을까. “우리나라에는 체계적으로 SF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시피 해요. SF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도 없고, 최근에나 SF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을 쓰는 정도이지 우리나라는 SF에 관해 관심이 크지 않아요. 자료들이 많이 없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실물을 보기가 어려워요. 옛날 신문이나 잡지에 기록이 돼있는 SF소설들이 어디에 소장돼 있다거나 실존한다는 확인이 불가한 것이 아쉬워요.” 이 때문에 현존하는 SF 작품 대부분은 외국의 콘텐츠이고 우리 콘텐츠는 빈곤하다. 이를 두고 박 대표는 우리나라 SF계의 저변이 두터워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가 SF로서는 후발주자다 보니 외국 SF 작품 중 난해하고 고도로 복잡한 과학기술이 묘사돼있는 작품은 제대로 번역해서 소개하지 못하고 있어요. 또한 그것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독자층도 얇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책을 발간하지 않아요. 일찍이 SF가 번역 소개되고 SF를 창작하는 작가들이 많이 등단하는 선순환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SF도 저변이 두터워졌을 거에요”라며 박 대표는 아쉬움을 전했다. 그래도 21세기로 넘어오면서 SF 신인 작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나 영화분야에서도 국내 창작 SF가 질적으로 괜찮은 작품이 나오고 있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라이파이(1959 한국SF만화) 

   
 
 
 
   
 

 

한국 SF의 아버지
한국 SF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궁금했다. “한민족만의 SF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해요. 현재의 한국 SF는 등장인물이 한국인이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한국이라는 것만 빼면 외국 SF와 한국 SF의 차별점이 없죠. 반드시 한국이 배경이 돼야 하고, 반드시 한국인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필연적인 논리를 작가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한국 SF 작가들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면 확실한 한국적 SF 장르가 나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덧붙여 SF 작가 지망생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어려운 첨단 과학기술을 소설 형태로 써야만 훌륭한 SF라고 생각하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형태보다는 스토리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SF 작가 지망생들이 지양해야 하는 태도 또한 조언해주었다. “우리나라 영화계는 아직도 SF라면 돈을 많이 들여서 화려한 특수 효과로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외국에는 저예산으로 만든 수작 SF 영화들도 적지 않아요. 사람들을 감동시킬 스토리가 먼저이며, 그를 뒷받침해 줄 적절한 특수효과는 나중에 고민해도 되는데 말이죠.” 한국 SF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조언하는 박 대표의 말에서 그가 한국 SF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박 대표는 SF가 사람들에게 주는 시공간적인 시야의 확장을 사람들 모두가 경험해 봤으면 하는 희망을 드러냈다. “SF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관련된 시공간적 시야의 확장이 있어요. 이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린다면 모든 사람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과 역사를 볼 수 있어요. 그러면 현재 세태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고, 바로잡고 개선을 하자는 이야기를 할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 정치권처럼 근시안적인 이권 다툼을 하는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거예요”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SF에 대한 동지애적인 제안을 했다. 또한 그는 SF를 보고 현재를 생각하자는 게 아니라 시야를 넓혀 다음 세대, 미래 세대를 위한 생각을 하자고 말을 이었다.

△비명을 찾아서(역사 대체 소설)

마지막으로 박 대표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제가 있으므로 해서 우리가 세상과 우주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싶네요. 우리의 시야를 트이게 했던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야를 트이는데 일조를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겸손한 그의 포부에서는 SF의 아버지다운 진정성이 느껴졌다.

 

사진 제공: 박상준<서울 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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