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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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예림 기자, 정진영 기자, 조민아 수습기자
  • 승인 2015.04.25
  • 호수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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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나온 자만이 보물을 가질 수 있다, 미국에서 만난 ‘어머니’ 그리고 ‘교육학’

 

TIME 일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수들의 과거 모습은 어땠을까? 그들의 과거를 살펴보기 위해 한대신문에서 ‘TIME 머신’을 개발했다. T는 Treasure로 ‘가장 보물 같았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I는 Imagination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상상을 했을 때, 가장 되돌리고 싶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M은 Making으로 지금의 교수님을 있게 해준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E는 Efficiency로 ‘가장 효율을 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캠퍼스에서는 유성호<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ERICA캠퍼스에서는 김동환<예체능대 생활스포츠학부 경기지도전공>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과거를 지나온 자만이 보물을 가질 수 있다 현재 문학 비평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다수의 책을 출간하고 다양한 강연도 진행하고 있는 유성호<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스스로 ‘가장 분주한 비평가’라고 소개하며 비평가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시 쓰기를 좋아하던 순수한 문학 소년에서 현재는 저명한 문학가가 된 유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T“시대를 품은 글” 보통 글 쓰는 사람은 처음 문학작품을 접하거나 창작했던 유년시절을 보물 같은 시간으로 꼽는다. 그러나 유 교수는 ‘대학 시절’을 꼽았다. 덧붙여 “그때 지금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마음 속에 품고 가는 지표가 형성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 지표가 추상적이었을지 몰라도 굉장히 강렬했다”라며 대학 시절을 ‘보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가 대학 및 대학원을 다니던 80년대는 군사정권이 자리 잡고 있었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유 교수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는다’는 아랍의 속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대를 닮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후에 규정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억이 미화되고 과장됐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마치 자신의 기억을 신뢰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한편, 유 교수는 현재의 청춘들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나온 자만이 보물을 갖는 거다. 하지만 청춘들은 현재가 ‘보물’ 같은 시간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지금의 시간을 가치 있는 보물처럼 여겼으면 좋겠다” I“공부에 대한 아쉬움” 유 교수는 “우습게 들리겠지만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별로 없다”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더 잘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을 떠올려보니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고 했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인데다 민주화 운동도 강렬하게 나타나던 시기여서 강의에 전념하던 분위기도 아니었고, 공부도 과제에 치우쳐있었다. 대신 동기, 후배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신춘문예’에 여러 번 작품을 보내는 등 문학적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책을 읽고, 내 전문 분야 이외의 인접 학문에 관한 책도 읽고 싶다”라고 말했다. 유 교수의 대학 시절은 외국어가 사회적 위상을 보장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던 때였다. 지금은 외국인을 만나도 큰 두려움 없이 의사소통 하는 시대지만, 당시는 ‘외국어 공부할 시간에 책이나 더 읽지’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는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면서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없다고 거듭 말했다. 결국 자신을 ‘오만’하다고 평가하며 웃었지만 정말로 아쉬운 순간은 없는 것 같았다. M“창작에서 비평으로” 유 교수는 파란만장하면서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 원했던 대학 교수에 재직했고, 사랑하던 여자랑 결혼을 하는 등 유 교수가 꿈꿔왔던 인생을 펼치고 있다. 굴곡 없이 살았기 때문에 유 교수는 인생의 반전계기를 쉽게 짚어내지 못했다. 고민을 하던 유 교수는 시를 쓰던 자신이 ‘비평가’가 된 것을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꼽았다. 유 교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비평에 관심을 갖게 됐다. 창작과 비평은 문학을 지탱하는 상반된 개념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과 창작물을 비평하는 사람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전환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유 교수는 대학원에서 ‘비평’의 논리적인 매력에 빠져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시를 써오다가 대학원에 와서 논리적인 줄글을 쓰게 되면서 비평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원에서 깨달은 논리적인 글의 매력은 유 교수의 ‘비평가’로의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덧붙여 유 교수는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처럼 한가롭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그때부터 정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며 서남대학교에서 처음 교수 생활 시작을 했던 시기도 하나의 터닝 포인트라고 말했다. E“열정의 비평가” 유 교수는 “요즘도 신간이 나오면 사서 읽어본다. 전공 외 분야에도 항상 열정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라며 단 한 순간도 열정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전력투구를 한 시기는 비평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던 때였다. 「‘폐허’를 건너 ‘치유’를 꿈꾸는 종교적 상상력」(1999)으로 ‘신춘문예’의 비평 부문에서 현직 교수 최초로 당선되었고 박사 과정 동안 많은 비평 청탁도 받았다. 현재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강연도 하고, 책도 발간하는 등 인문학계에서 저명한 인물이다. 이렇듯 끊임없는 비평에 대한 열정은 그에게 있어 가장 ‘효율적인’ 시간을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비평은 타인의 언어를 가지런하게 혹은 풍부하게 분석하고 해명하고 증언하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양도할 수 없는 자기 언어를 담고 있다. 그래서 창작이 아니더라도 나는 비평과 연구를 통해 자기 언어의 각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유 교수의 문학적 자전에 담긴 내용이다. 이는 비평에 대한 유 교수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대학원 졸업 후 26년 간의 비평가 생활 동안 지켜온 이 열정이 지금의 유성호 교수를 만들었다. 정진영 기자 jjy319@hanyang.ac.kr 조민아 수습기자 jomina213@hanyang.ac.kr



미국에서 만난 ‘어머니’ 그리고 ‘교육학’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Dr. Zakrejsek<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전 체육대학 학장> 전 교수(이하 Dr. Zak)다” 한양대학교 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김동환<예체능대 생활스포츠학부 경기지도전공>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을 TIME 일지에 소개했다. 또한 당시 석·박사 과정 지도 교수였던 Dr. Zak을 인생 속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덧붙여서 김 교수는 아직도 그녀와 연락한다. T“떠오르는 USA life” 1981년 9월에서 1986년 1월까지 김 교수는 미국 아이다호주립대학에서 유학시절을 보냈다. 김 교수는 유학 기간 4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체육학을 전공했고 체육학 석사 학위를 얻었던 그는 Dr. Zak의 추천으로 스포츠 교육학의 세계에 빠져들게 됐다. 그리고 아이다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의 학위를 따내고 만다. “1981년에서 1986년 미국 유학 시절이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새로운 사회를 알게 됐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학문도 알게 됐다. 그때 알게 된 학문으로 현재 이 곳에서 강의를 한다” 학문적인 측면과 아울러 가족과 소중했던 시간이 존재했다. ‘안식년(교수가 연구에 몰입하기 위해 갖는 시간)’이라는 시기가 있는데 김 교수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가 ‘그’ 시기였다. 미국 ASU(애리조나 스테이트 대학)에서 강의와 함께 주말에는 가족 캠핑을 즐기며 1년간 부담 없이 즐겼다. 그는 “미국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됐다. 그 시절이 좋은 가이드라인이 돼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캠핑을 자주 했었는데 현재 한국에서도 캠핑을 하고 있다”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I“Back to 1987” 김 교수는 1987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명돼 2008년부터 생활체육과학대학장을 그리고 2010년부터 2012까지 예체능대학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과거 승마 국가 대표까지 했던 김 교수는 현재 FEI(국제승마협회)의 국제심판, KBS 스포츠국 승마경기 해설위원, OCA(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의 교육위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런 김 교수에게도 후회되는 순간이 존재했다. 1987년 한양대학교 교수 재직 후 학교에 적응하는 일에 바빠 학문적 깊이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는 “한양대학교에 와서 논문을 더 많이 쓰면서 학문에 깊이를 더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아쉽다”라며 다시 돌아간다면 한양대학교에 와서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한 김 교수는 당시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스스로 관계의 벽을 만들었다.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벽을 만들었고, 극히 일부의 학생들과 어울렸다. 김 교수는 이 시절 또한 아쉬워했다. 그는 “지금 당시 학생들과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는 순간을 보면, ‘옛날에 내가 더 많은 학생을 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생긴다”라며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표현했다. M“Change myself” 과학 속 현상을 알아내 그것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스포츠다. 스포츠도 과학의 한 분야인 것이다. 교육학은 여기서 시작된다. 좋은 연구라도 현장에서 올바른 지도가 없다면 결과도 없다. 결국 스포츠 교육학은 ‘지도자(교수)가 선수(학생)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느냐’의 이야기다.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던 김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 Dr. Zak의 추천으로 ‘수업 속 지도’인 교육학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현재의 김 교수를 만들어준 계기는 바로 Dr. Zak이 교육학의 중요성을 알려준 것이다. 김 교수는 교육학의 중요성을 영어의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교육은 영어로 education이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육의 단어 사용이 잘못됐다. educe는 ‘끄집어내다’라는 뜻이다. 결국 한국 교육 방식인 주입식 교육이 아닌 학생들에게 기회를 줘서 머릿속에 있는 학생들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그런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중요성을 바탕으로 김 교수는 교수 중심과 학생 중심 두 교육 체재 중 학생 중심 교육을 선택했다. 그의 교육은 강의 시간에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 학생 참여를 장려하는 형식이다. E“교육학에 All in” 유학 시절 김 교수는 새로운 학문에 빠져 방학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4년 반이라는 유학 시절이 김 교수에게 있어서 전력투구를 한 시기라 말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일주일에 12시간 이상을 교양체육과 학부수업을 직접 강의를 하고 월·화·수·목요일에는 7시부터 10시까지 대학원 3학점 과목 강의를 듣는 등 스파르타식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학위도 일찍 끝내고 한양대학교에 와서 교수생활도 하게 됐다. “사실 전력투구했던 시기 덕분에 한양대학교에 와서 지금까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결국 열정을 태웠던 노력으로 인해 최대 효율이 발생한 것이다” 유학 시절, 김 교수는 Dr. Zak의 도움으로 힘든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Dr. Zak이 직접 그녀의 집에 초대해 함께 명절을 보내주는 등 미국 생활에 수월하게 적응하도록 도와줬다. 또한 Dr. Zak이 자신을 강인하게 교육시켰기 때문에 현재 스피치를 할 때 주변인에게 “칼이 굉장히 있다(=카리스마가 있다)”라는 농담을 듣는다고 한다. 김 교수는 그런 Dr. Zak를 강인한 어머니라 표현하며 아직도 존경한다는 말을 전했다. 장예림 기자 eeeeeeeja@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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