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 법조계의 길을 닦은 손용근 대표와의 특별한 인터뷰
한양대학교 법조계의 길을 닦은 손용근 대표와의 특별한 인터뷰
  • 한민선 기자
  • 승인 2015.04.25
  • 호수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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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탕수육, 그리고 고량주 앞에서 질문하다

한양대 법학과 71학번인 손용근 법무법인 동인 대표(이하 손 대표)는 ‘한양대학교(이하 한양대) 출신 사법시험 1호 합격자’라는 특별한 수식어를 달고 있다.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서울행정법원 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법원장, 특허법원 법원장, 사법연수원 원장을 거쳐 지금은 법무법인 동인 대표로 법조인의 삶을 이어오고 있으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서 후배들을 위해 강단에 서고 있다.

 

사무실 입구에 걸려있는 서화 앞에서
손 대표와의 인터뷰는 특별했다. 몇 차례의 이메일과 문자 그리고 전화 끝에 손 대표와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강북에서 학교를 다니는 기자는 인터뷰를 위해 찾은 강남의 높은 건물에 감탄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는 수많은 엘리베이터 중 손 대표를 만나기 위해 17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두 명의 비서를 거친 후에 접대실에서 손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압감을 주는 공간과는 다르게 손 대표와의 만남은 기자와 인터뷰이의 만남이 아닌 후배와 선배의 정다운 만남이었다.
손 대표는 사무실 앞으로 기자를 데려가 자신이 그린 서화를 보여줬다. 문인화나 서예에 대해 조예가 없는 기자가 보더라도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붓을 들면 잡념에서 해방되고, 문인화는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 있어 좋습니다.”
손 대표의 예술 활동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갑자기 궁금증이 떠오른 기자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서화 앞에서 서화를 그리게 된 계기를 물었다. “5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붓을 잡았습니다.” 손 대표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에 서당을 다닌 마지막 세대로,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배웠다. 한자를 배우면서 시작된 예술 활동은 1980년대에 손 대표에게 예술을 가르쳐 준 석계 선생님을 만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에 태어난 기자에게 서당의 존재는 생소했다. 손 대표는 서당이라는 단어에 이질감을 느끼는 기자의 표정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배우면 7살쯤 되면 웬만한 이치를 깨닫고 허튼짓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한문을 10살까지만 제대로 배우면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젊을 때 분수에 맞지 않게 명품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면이 가득 차면 외적인 과시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 점을 요즘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맛있는 탕수육 한접시 앞에서
말문이 터진 기자는 마음이 앞서 서화 앞에 선채로 질문들을 쏟아냈다. 손 대표는 그런 기자에게 “밥이나 먹자”라며 기자를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탕수육을 주문하며 많이 먹으라는 손 대표가 오래 알고 지낸 선배처럼 느껴졌다.
손 대표에게 한양대 고시반 추억을 물었다. “70년대 고시반 시절 때, 법학과가 생긴 지 수년이 지났으나, 아직 사시합격자가 없어 불안과 황량감이 심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부만 했습니다. 방학 때는 오전에 두 번만 화장실을 갔다 오도록 하였고 그 외 시간에는 방문을 잠가버렸으며, 삭발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4시간씩 3년간 공부를 하여 결국 합격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여러 고민을 잠시 접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손 대표가 1975년 사법시험을 합격하기 전에 한양대에는 법조 선배가 없었다. 광주·전남 지역 예비고사에서 2등을 하고 한양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그에게 학교의 기대가 컸다. 그러한 암울한 상황과 부담스러운 기대 속에 손 대표는 어땠을까.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느냐에 대한 걱정이 깊었습니다. 그 당시는 일 년에 수천 명이 시험을 보아 60명이 합격할 때였습니다. 합격이 의심되니 낮이나 밤이나 정체를 모르는 불안과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불안감 속에서 손 대표는 ‘몰두’했다. “공부에 대하여 몰두했습니다. 그 당시 적었던 학습 일지를 보면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도로서 매일 아침 성서를 보면서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4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불안과 스트레스도 결국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습니다.”
불안감 속에 재밌는 일도 있었다. 손 대표는 당시 수석합격생이라 법학과 과대표를 자연스럽게 맡았다. 과대표라 미팅을 주선해야했는데, 무용과가 법대와의 미팅을 정중히(?) 거절했다. 한양대에 법학과가 있냐고 물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과거를 상상하지 못할 만큼 성장했다. 손 대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무시 못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히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 대표는 여러 법원장을 거쳐 지금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그리고 법학전문대학원 평가위원회장으로 있다. 그런 손 대표에게 로스쿨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일본의 로스쿨이 71개로 출발해 20여개가 없어졌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5년 먼저 출발했는데 합격률이 20% 이하입니다. 그 점에서는 일본의 로스쿨은 실패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5년 늦게 출발해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6년 밖에 안 되어 지금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본보다는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대립하는 부분들도 많다. “올해 60%정도였습니다. 실무 법조계 쪽에서는 합격률이 높다고 주장하지만, 교수들은 정반대입니다. 서로 평행선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배출한 변호사가 만 명 정도인데, 지난 10년 동안 만 명 정도를 배출했습니다. 급속도로 변호사 합격자 수가 증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로스쿨이 걱정되는 점이 많습니다. 역기능이 나오지 않도록 즉각 지혜를 모아 로스쿨 제도가 안착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계와 실무계가 평행선을 달릴 것이 아니라 서로 양보하며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손 대표는 특별히 예비 법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대개 1등한 사람이 법조인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많습니다. 하지만 1등을 한 사람은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들은 2등부터 40등이 나를 위해 박수를 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등부터 40등은 1등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생에게 ‘1등만 하는 것을 미안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좋은 법조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쓰디쓴 고량주 한 잔 앞에서 
배가 살짝 불러올 때쯤 손 대표와 고량주 한 잔을 마셨다. 기자는 처음 먹어보는 술이었다. 고량주를 살짝 입에 머금었을 때,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쓴 맛이 느껴졌다. 따가운 술의 목넘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술의 힘을 빌려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오랜 법조실무 생활과 함께 예술 활동, 논문 발표를 활발하게 해 온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이 더 있을까. 손 대표는 담담하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제 나이가 60대 중반입니다. 마음으로 너무 많은 계획을 갖는 것은 이미 포기할 때입니다. 해방 이후 6개의 법원장을 지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걸로 한양대학교 사법시험 1호 합격생의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호사 겸 교수를 하면서 적당한 때 은퇴를 하고, 책을 쓰고 그림을 계속 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써 둔 원고들이 많습니다. 정리가 안 돼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70이 되었을 때, 정말 가치 있는 책 한 권 출간하고 싶습니다.“
 혹시 대학생 후배들이 한번쯤 해봤으면 하는 경험이 있을지 물었다. 그에 손 대표는 ‘배고픔’을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물만 먹고 하루라도 견뎌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굶어봐라. 단군 이래 가장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면서도 많은 궁핍을 느끼는 이 시대의 젊은이에게 이렇게 맨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손 대표에게도 역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다. “한양대학교 1학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죽어라 공부할 것입니다. 하루 14시간씩 공부한 것처럼 다시 한 번 공부할 것 같습니다.”
손 대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또 다른 상상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는 예술가에 훨씬 맞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대의 물결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에 예술을 하게 되었으면 영화감독을 했을 것 같습니다. 벤허(Ben-Hur)같은 유명하고 심오한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영화는 오락 영화로 심오한 메시지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식사가 끝날 때쯤 손 대표는 똑같은 질문에 세 번째 답을 했다. “만약에 새로운 대학을 선택할 수 있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과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공부에도 끝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끝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매우 허망할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과연 공부의 대가다운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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