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자치, 그리고 무관심의 수사학
학생자치, 그리고 무관심의 수사학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4.11.24
  • 호수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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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A 총학생회 임원들의 그간 수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에 대해 실망을 감출 수 없다. 나현덕 총학생회장의 말처럼 학생회 활동은 기본적으로 정치가 맞다. 하지만 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정치는 달라야 한다. 이번에 ERICA 학생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기존에 국회에서 봐 왔던 파행과 다를 것이 없었던 점, 그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학우들의 실망감도 대체로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총학생회장 출마 자격을 제한하려 했던 시도, 당사자들끼리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언론사와 SNS, 대자보를 통해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 학생들의 의문점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감정적인 대처들. 이를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도 되뇌였던, 주변에서도 많이 들었던 단어가 있다. ‘노답’이라는 단어다.
특정 시기의 대중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유행하는 언어들을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최근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유행어, ‘노잼’, ‘극혐’, ‘노답’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을 생각해 봤다. 무심코 쓰는 말들이 어느샌가 우리의 관심과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몇 글자의 단어들로 누군가의 의견이나 성향, 가치관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잼’이라는 단어는 ‘없다’를 뜻하는 ‘no’와 ‘재미(잼)’가 합쳐진 말로, 그야말로 재미없다는 뜻이다. 주로 누군가 장황한 게시물을 올리면 댓글로 ‘노잼, 노관심’이라고 응수하는 식이다. 현실에서도 농담을 던졌을 때, ‘재미없어’나 ‘관심 없어’라는 반응보다는 ‘노잼’, ‘노관심’이라는 반응이 훨씬 냉소적이고 공격적이다.
또 다른 예로 ‘극혐’은 ‘극도로 혐오스럽다’의 줄임말이다. 매우 싫다는 의사를 이렇게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보통 이 혐오의 이유는 없다. 이 단어는 본인의 취향 밖의 대상을 ‘극혐’으로 분류하고 아예 논의 자체를 회피하게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총학 극혐’이라고 말한다면 총학은 항변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그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 총학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다음 총학 후보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이 한 마디 앞에서 아무 힘도 가지지 못한다. 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쨌든 총학생회에게 본인 취향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갑’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과 관심을 무력화시키는 단어가 있다. ‘노답’이라는 단어. ‘노잼’과 같은 방식으로 ‘답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복잡한 현상이 있어도, 갈등이 생겨도 그저 ‘총학생회 정치판 노답’, ‘요즘 대학생들 노답’, ‘내인생 노답’ 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답이 없더라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다.

이렇게 방어적이고 권위적이고 자조적인 단어들은 대상을 쉽게 규정짓는다. 나의 실소라도 자아내지 못한다면 노잼, 내 신변과 관련 없는 일이라면 노관심,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극혐, 그래도 생기는 갈등에는 노답이라고 응수하면 된다. 이 짧은 단어들 앞에서 모든 격렬한 논의들과 노력들은 힘을 잃는다.

솔직히 이번 ERICA 학생회 선거 사태는 정말 답이 없긴 하다.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주장만을 하고 있을 뿐 학생들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노답’이라며 혀를 차고 외면할 것인지, 그럼에도 학생사회의 재건을 위해 끝까지 관심을 가질 것인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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