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덕후의 다짐
어떤 덕후의 다짐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4.11.10
  • 호수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빠순이가 어때서. 얼마나 건전한데. 계산하지 않고. 빠순이의 기본은 열정이야. 이걸로 사회에 나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나.”

케이블 드라마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뤘던 「응답하라 1997」 주인공 성시원의 대사이기도 하고, 필자가 지난 해 ‘아이돌 팬덤’에 관해 쓴 기사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또, 살아온 날 중 대부분의 날들을 누군가의 ‘덕후’로 지냈던 본인에 대한 합리화이기도 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덕후들’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며 특정 대상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애정을 옹호하는 편이지만, 누군가에게 열정을 쏟는 일은 때로 아주 힘들다. 나의 경우는 꽤 오랫동안 그 대상이 그룹 에픽하이의 타블로였다. 이 재능 있는 랩퍼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학력 논란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일방적인 진실은 조직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개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의 하루 일과가 네티즌들의 인격 모독적인 악플에 신고 버튼을 누르고 다니는 것이었던 그 때, 바로 그 네티즌들은 메일을 통해 자선기금을 모으고 기부를 하기도 했다. 대체 누가, 그렇게 악의적이고 조직적인 해악에 동조하는 것인지, 또 누가 이유 없는 선의에 참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익명에 가려진 대중들의 속성은 모호하며 너무나도 유동적이다.

이러한 현대 대중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군중심리의 대가 구스타프 르봉은 ‘집합적 주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가치중립적이며, 수학적 덩어리를 의미하는 ‘집합’과 존재론적인 ‘주체’가 결합되어 전혀 새로운 속성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결코 개별적인 개인들의 연산적 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대개 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집합적 주체들은 단순하고 과잉된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다. 감염과 전달을 통해 감정과 사상의 일체화를 경험하는 이들이다. 마치 무리지어 다니는 좀비 떼처럼 본인의 평소 모습이나 의지와는 다르게 다수의 움직임에 휘둘리는 것이다. 무리를 얻은 좀비들은 타블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좀비와 관련된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좀비가 대중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우상에게 일명 ‘타진요 사태’라는 불행이 일어났을 때, 여고생이었던 나는 세상에 대한 증오에 치를 떨고 있었나 보다. 그 때 쓰던 일기장에서 “타블로를 나락으로 몰아세웠던 대중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단호한 문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불과 몇 년 전, ‘우리 오빠’가 상처 입는 모습을 보며 ‘좀비’가 되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다짐처럼, 지금의 나는 대중의 틈에서 주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다른 버튼은 고를 수 없는 사회에서 그저 ‘좋아요’라는 소심한 동조를 하는 것.  간담회나 공청회에 참석해서 발언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나무숲’에 의견을 내기는 쉬운 것. 의무적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챙겨보거나 음악 차트에 줄 세워진 노래를 듣는 것….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이지만, 주체적인 의견과 취향이 부재한 선택들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무시무시한 좀비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좀비 같은 대중이 되지 않겠다는 여고생 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아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