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다수일 것이라는 착각
언제나 다수일 것이라는 착각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4.10.04
  • 호수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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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BT 어떻게 됐어?"
“또 안 됐지 뭐”
지난 3년간 동료 기자들이 전학대회에 다녀와서 흔하게 나누던 대화였다. 참 오랫동안 ‘LGBT 인권위원회’의 명칭 다음에는 ‘(준)’이라는 글자가 따라 붙었다. 지난 2011년부터 중앙특별위원회를 ‘준비’해왔지만, 학생 대표자들의 동의를 얻는 데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학대회에서는 ‘한양성적소수자인권위원회(이하 성소위)’로 명칭을 바꾼 ‘LGBT’가 중앙특별위원회로 인준됐다. 성소위는 이제 이름 뒤에 ‘(준)’을 붙이지 않아도 되며, 공식적인 활동을 준비해나갈 수 있다. 성 소수자를 위한 학생 자치기구가 중특위로 인정된 경우는 우리 학교가 세 번째인 만큼 그 의미가 크다.

본지에서도 여러 번 다룬 바 있는 것처럼, 성소위가 자치기구로 인정된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3년간 많은 대의원과 학생 대표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성원 미달로 안건 자체가 논의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성소위 이외에도, 이미 공식적으로 활동 중이지만 매번 우여곡절을 겪는 자치 기구도 있다. 우리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대학 사회 대부분에서 존폐 논란을 겪고 있는 총여학생회다. 이번 전학대회에서도 총여 집행부 인준 차례에는 대의원들의 질문이 특히 더 날카로웠다.

총여의 존재 여부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왜 학생 전체가 내는 학생회비를 여학우들의 이익만을 위해 쓰냐’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따지자면, 학생회비를 소수의 권익을 대표하는 자치 기구와 나눠서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래서 더 나은 효율을 논할 수는 있고, 이는 꼭 필요한 절차다. 성소위나 총여를 둘러싼 여태까지의, 혹은 앞으로의 논의가 가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접했던 논의 중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는 발언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혐오성 발언의 기저에는 본인이 ‘다수’에 속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다수가 강자가 되고, 소수가 약자가 되는 사회에서 본인은 강자의 편에 서 있다는 자의식은 권력으로 쉽게 착각되곤 한다. 어떻게 보면 현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폭력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본인이 다수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수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다수에 속하는 이성애자의 권력으로 성 소수자의 결혼식에서 오물을 투척하는 사람들, 남성이라는 권력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여성 비하를 일삼는 사람들.

박선영<한국일보> 기자는 칼럼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에서 “‘갑-되기’가 시대정신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대부분은 약자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한 것이 아름답고, 약한 것이 추하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적응한 사회는 ‘모두가 갑이 되길 원하고, 기적적으로 모두가 갑이 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언제나 소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동성애 혐오자의 아들이 어느 날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고 장애인 복지 시설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라도 다수에서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소수에 대한 혐오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내가 소수, 혹은 약자가 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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