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다수가 독재를 지지하면, 민주주의일까? 독재일까?
국민의 다수가 독재를 지지하면, 민주주의일까? 독재일까?
  • 전예목 객원기자
  • 승인 2014.09.20
  • 호수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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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민주화’의 출발점, ‘대중독재’

현재 광화문에 나가보면 어느 한 편에서는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폭식 투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식과 폭식이라는 두 개의 극단적인 이미지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갈등의 극단성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한국 정치는 민주화됐다고 말하지만 광화문 광장에서는 ‘개밥’이나 ‘폭식’으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미숙한 정치적 행동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 정치는 제도적으로만 민주화가 진행됐지 아직 질적인 민주주의로 이행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이를 두고 최장집<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견 보기에 그의 주장은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모순으로 보인다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지고지순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때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갈 수 있다.

심지어 흔히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독재조차도 민주주의의 일부일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임지현<인문대 사학과> 교수가 있다. 임 교수는 민주주의에 관한 독특한 시각을 가진 ‘대중독재’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통해 일반적으로 가진 민주주의의 순수성을 무너뜨린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의어(反意語)일 수 있는가?
“국민의 다수가 ‘독재’의 지배방식을 지지한다면, 그 독재 체제는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다수에 반해 소수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대중독재’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처음 이 질문을 받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질문은 바로 독재와 민주주의의 경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재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서로 침투하는 모순적인 대상으로 인지한다면 앞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뿐더러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대조어법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민주주의와 독재를 반의어 관계로 보는 대조어법의 논점에서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것이냐는 구호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가 가진 병폐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대조어법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선한 것이고 지극히 선한 것에 선함을 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조어법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현재 한국 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의 해결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지 못하게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치 문제가 불거지면 야당에서는 으레 ‘이명박 독재’, ‘박근혜 독재’와 같은 정치적 구호를 제시한다. 이런 구호들은 마치 독재 정권만 종식하면 완전한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비춘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독재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이분법으로 보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독재 정권이라고 얘기하는 단순 논리에 빠져드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모순어법으로 시작하는 대중독재
대조어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서로 침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대중독재의 모순어법이 필요하다. 우선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독재와 민주주의는 반의 관계가 아니었다. 로마 시대 때 독재의 의미는 비상사태에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재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닌 ‘정상상태’의 정치 상황이었다.

한편 민주주의의 반대는 귀족정이나 군주정이었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만 귀족정이나 군주정에는 주권이 귀족이나 군주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한 점만 봐서도 정통성을 국민에서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해 독재와 민주주의가 서로 침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전근대 사회와 달리 근대 사회에는 독재든 민주주의든 똑같이 국민의 동의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민주주의와 독재의 상호침투는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언론이 만들어낸 ‘민주적 독재자(democrat+dictator=democratator)’가 그 예다. 러시아의 푸틴과 베네수엘라의 차베즈의 높은 인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 단어는 푸틴과 차베즈와 같은 독재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대조어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모순어법으로 독재와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비로소 대중독재가 보인다. 앞에서 선문답처럼 던졌던 “국민의 다수가 ‘독재’의 지배방식을 지지한다면, 그 독재 체제는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의 답이 바로 ‘대중독재’다. 임 교수는 “대중독재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같은 개발 독재체제에 지지를 던진 대중의 욕망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대중독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성이다. 20세기의 제노사이드는 민주주의의 사생아였다. 예를 들어 르완다에서 일어난 학살 같은 경우 민주주의라는 명목 아래서 자행됐다. 르완다 인구의 90%가량인 후투족이 인구의 10% 되는 투치족을 제거했다. 임 교수는 “이때 르완다 국민의 다수였던 후투족은 ‘다수파 민주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후투족을 학살했다”라고 했다. 다른 사례로는 나치 시절 독일 때의 뉘른베르크 법, 박정희 시대의 반공법과 같은 것이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쉽게 소수를 학살하거나 억압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데에 능했다.

여기서 대중독재를 이해할 때 주의할 사항은 대중독재가 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독재를 같은 것으로 취급한 것 또한 아니다. 단지 민주주의가 내포한 위험성을 강조한 것이다. 임 교수는 “민주주의는 다수가 가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견제하고 소수자의 정치가 돼야 한다”며 “다수자의 횡포로부터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중독재의 또 다른 의의; 토종이론의 창조
한국에서는 인문학이든 역사학이든 많은 학문 분야에서 서양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자체적인 이론을 만드는 힘이 약하다. 마치 수입상처럼 서양의 이론을 수입한 다음 우리나라의 자료를 그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경험적 자료로만 제공하기 일쑤다.

하지만 임 교수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한국이라는 나라가 사실 식민지도 겪고 북한의 좌파 독재, 남한의 우파 독재 모두 겪었는데 이렇게 끔찍하고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회에서 독재에 대한 자기 이야기조차 없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며 대중독재 이론의 의의를 설명했다.

대중독재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국내에서는 좌/우파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국외에서는 호응을 받았다. 실제로 팔그레이브 맥밀란(Palgrave Macmillan)이라는 영국 출판사에서 다섯 권 시리즈로 책이 나오고 사전도 출판됐으며, 국제 학계의 인정도 받았다. 특히 사전이 나왔다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이론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 석학들에게도 인정받아 국제대회도 여러 번 개최한 바 있다.

도움: 임지현<인문대 사학과> 교수
참고: 논문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의어인가?」, 임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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