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아들에게,
  • 전영식 책임프로듀서
  • 승인 2014.08.31
  • 호수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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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구나, 그간 잘 있었니? 30년 전, 대학 1학년 때 우리 학교 신문에 <K에게>라는 글로 소통을 한 후, 이제는 아들에게 글월을 써본단다.

이번엔, <불안>이라는 글감으로 얘길 해 보자. ‘불안‘이라는 사전적 해석은 <1.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 함 2.분위기 따위가 술렁거리며 뒤숭숭함>으로 적고 있더구나. 아들도 불안하지? 나도 물론 불안하단다. 셀 수 없는 많은 이유로 불안하지. 내 안의 불안, 나와 연계된 불안, 나와는 거리가 있는 불안 등으로. 대학원 코스워크 때 읽었던 아티클에서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문화산업시대의 문화정책에 대한 논리를 매끈하게 추론했던 분의 글을 잠깐 빌어보자. <우리는 불안을 멈추거나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바로 그 불안의 원인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고자 욕망한다. 우리는 권력, 명예, 재산, 연인, 가족, 생명, 지식 등 불안의 원인을 완전하게 소유하거나 통제하려 긴 투쟁을 수행 한다>. 공감한다. 불안은 참으로 끈적끈적하게 우리의 심신에 습착해서 우리를 괴롭히는데도 공감하고, 그 불안을 소유하고, 통제하려 한다는데도 공감한다. 그래서 불안은 마치 방향감 잃은 고속 금속물질이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휘저으며 헤집고 다니는 듯하다. 그러기에 ’불안’이라는 이것은 경쟁, 자본, 권력 등의 추진체와 결합하여 미화되기까지 한다. 경쟁을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경쟁을 넘어 무한경쟁이라는 용어가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문법으로서 비장하게 등장하는 걸 보면서 씁쓸한 마음은 더해만 가는구나.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소개하는 글에서, ‘불안한 현대사회’는 분명 ‘불안한 중세’나 ‘불안한 근대’보다 훨씬 어울리는 단어의 결합임에 틀림없다고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울린다’는 표현보다 ‘와 닿는다’는 서술이 더 실제적이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인류가, 문명이 진화할수록 불안은 그 덩치를 더해가는 건 분명한 것 같다. 학업, 취업, 승진, 가계수입과 같은 개인적인 불안에서부터 세월호, 싱크홀, 자연재해 그리고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 같은 사회적 불안까지, 우리 주변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들을 본다. 중요한건 이런 불안들을 전략화하고 상품화하며 도구화하는 현대인들의 기민한 생존지략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불안에 익숙해 있고, 길들여져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불안을 탈출하기 위해서 핑계와 망각에 민첩하다. 권력들은, 그게 미디어 권력이든 정치 권력이든, 자본 권력이든 간에 불안을 먹잇감으로 세를 불린다. 불안을 생산하고 증폭해서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낸다. 이걸 간과하지 말자. 불안을 이용하는 권력들을 세심하게 뜯어서 보자.

나는 불안을 빗대어 회의주의나 현실회피의 나약한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라는 운명 속에서 불안이라는 길항적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것을 바라보는 서늘한 눈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하는 거란다.

아들! 마음 건강, 몸 건강하거라. 참, 이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불안하지 않았구나, 잘 있거라.

<* 이 글은 필자의 스무 살 아들에게 실제로 보낸 편지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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