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기 전에, 진정하세요
서두르기 전에, 진정하세요
  • 금혜지 편집국장
  • 승인 2014.05.18
  • 호수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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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몰로지’(Dromology, 질주학)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가 제시한, 인류의 진화를 ‘속도’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여태껏 세계는 속도를 갈수록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인류가 ‘더는 가속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가 여기서의 핵심 질문이다.

물론 비릴리오의 이론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근래의 사회적 인식과 끔찍한 사고들이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사고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는 빠른 속도의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속도를 강조하며 강요하는 사례를 찾아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최근  경쟁적으로 수치를 앞세워 속도를 강조하고 있는 통신사 광고다. 광대역, 2배, 4배, 8배… 아예 ‘빠름 빠름 빠름’이라는 가사의 CM송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통신이라는 분야에서 속도는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조건이다.

교통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통수단이든 이동 시간의 단축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홍보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도 버스나 지하철이 어플에서 확인된 시간보다 단 1분만 늦어져도 불안해한다.

빠른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속도에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 매몰되는 것은 큰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통신의 속도는 마주보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시간을, 이동 속도는 주변 풍경을 눈에 담을 시간을 빼앗아갔다.

속도는 비단 개인의 삶에만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민의 삶보다는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도시 계획에서, 학생들의 생활보다는 투자와 경영에 집중하는 학교 운영에서도 속도의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학교 서울캠퍼스에서도 멀지 않은 잠실에는 현재 ‘제2 롯데월드’가 건설 중이다. 이곳 공사장에서는 지난해부터 화재와 근로자 사망사고 등 크고 작은 사고가 4차례나 발생했다. 시행사인 롯데물산 측은 애초 이달 저층부에 한해 조기개장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안전이 걸린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리하게 빠른 시기에 개장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번 안전 기획을 준비하면서 교내에도 이런 사례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했다. 현재 우리 학교 서울캠퍼스에서는 미래자동차공학관과 연구동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고, ERICA캠퍼스는 과학기술대학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미래자동차공학관의 경우 지난 12월 완공이 목표였다. 현재 완공 목표일을 넘긴 셈이다. 그러나 완공을 언제 하느냐는 우선시 되어야 할 질문이 아니다. 어떻게 공사를 진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특정 기한까지 사안을 진행하는 것은 효율적인 방법이다. 실제로 학교와 사회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의 모든 것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안전이 걸려있는 문제에서는 기한이 진행 상황을 옥죄어서는 곤란하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빨리 도착하는지가 아닌, 그 길에서 무엇을 느끼고 경험했는가가 삶의 문제의식이 되어야 한다.

40년간 로마를 통치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은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였다. 모든 과정을 천천히 검토하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두르라는 말이다. ‘천천히’가 없는 ‘서두름’은 우리가 발 디딘 모든 곳을 재난으로 만들 수 있다. 맹목적인 속도가 남기는 것은 위험뿐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속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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