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당연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 금혜지 편집국장
  • 승인 2014.04.28
  • 호수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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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가 있었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공직사회의 만성적 적당주의와 나태, 무사안일주의 무책임이 대형 사고를 불렀다”라고 말했다. “인명과 관련한 대형안전사고에 대해서는 반드시 행정적인 책임을 묻겠다”라고 한 것까지 당시의 사고는 ‘평행 이론’이 떠오를 정도로 이번 일과 비슷하다. 22년,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다. 그 동안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더 악화된 것 같다.

생명이 희생된 참사들을 비교하여 나쁨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1993년도와 비교해서 ‘악화’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 때문이다. 지난 며칠간, SNS 유저들과 네티즌들의 행태는 이미 큰 상실을 겪은 희생자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소셜 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동 중에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지만, 이 특징은 반대로 ‘이동성의 역설’을 만들어냈다. 이는 “떠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도착한다”라는 철학자 폴 비릴리오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즉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장소에 직접 다가가지 않아도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미디어 이용자들이 그 간접적인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소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며칠간 보았던 SNS 유저들은 그랬다. 물론 발표 당국과 언론의 보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이를 확대하고 재생산하여 상황을 악화시킨 역할은 SNS가 담당했다.

페이지 운영으로 수익을 올리는 관리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빠른 시간 안에 올렸다. 심지어는 세월호와 관련된 페이지를 만들어 (현재는 거짓이라고 판명된)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 페이지에서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제보자의 실명 공개’였다. 이렇게 확인되지 않은 기사나 캡쳐본을 ‘좋아요’하거나 인용해 분노를 표현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일지도, 그것이 진실이라 여기고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정의감에 불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의도야 어쨌든, 사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의 사람들이 불안을 조장하는 동안 당사자인 희생자들은 동요하고 상처받았을 것이다.

SNS는 자신의 공간인 동시에 모두의 공간이다. 느끼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항상 타인의 시선이 전제된다. 그 시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예측하기 힘든 SNS의 특성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일부 몰지각한 사이트의 몰지각한 네티즌은 유가족들을 ‘유족충’이라고 불렀다.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가식적이라며 비난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본인은 슬픔에 잠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있는 모습들에 넌더리가 났다.

공감 능력이 사람마다 상이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감정의 깊이는 상대방이 판단할 수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슬픔에 공감할 수 없다고 해서, 슬픔에 잠긴 다른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은 문제가 된다. 불필요한 표현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던가.

평소에 ‘당연히 그런거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개인적인 기준의 ‘당연함’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 지켜야 할 예의는 당연히 있다. 굳이 요란스럽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일상 속에서 이 비극을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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