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으로 세계와 소통하다
아리랑으로 세계와 소통하다
  • 이윤수 기자
  • 승인 2014.04.26
  • 호수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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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유랑단 단장 문현우

16개국 31개의 도시를 아리랑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리랑 유랑단’의 단장 문현우 씨의 이야기이다. 아리랑은 어렸을 적 힘든 시기 마다 그에게 버팀목이 됐다고 한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아리랑을 통해 세계 사람들과 문화로 소통을 하는 대한민국 외교사절단의 단장 문현우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화외교사절단 아리랑 유랑단
한대신문(이하 한): ‘아리랑 유랑단’이 무슨 단체인지 궁금해요.
문현우 씨(이하 문): 아리랑 유랑단은 한국문화 외교사절단입니다. 세계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아리랑을 이용한 문화 소통을 하는 단체죠. 현재 우리 단체는 ‘아리랑 스쿨’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리랑 스쿨은 콘서트, 세미나 그리고 힐링이란 주제로 구성되어 있어요. 콘서트는 말 그대로 아리랑을 이용한 공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미나는 역사 공부, 아리랑 부르기 그리고 서예를 통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힐링은 조용한 환경에서 판소리를 듣고, 들었던 생각을 서예로 표현하고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치유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한: ‘아리랑 유랑단’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요?
문: 2011년이었어요. 중국이 동북공정 문제를 가지고 우리나라와 대립 중인 상황이었어요. 아리랑마저 자신들의 역사라고 말하는 그들을 보며, 내가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걸 찾던 중에 ‘아리랑 유랑단’을 창단하게 됐어요.

한: 단지 중국의 역사 왜곡이 아리랑 유랑단을 만들게 된 이유인가요?
문: 아리랑은 제 인생에 있어 깊은 의미가 있는 노래에요. 제가 어렸을 적 말레이시아로 조기유학을 떠났을 때 향수병을 앓게 됐어요. 하지만 그 때 축구국가대표팀이 원정을 왔는데 당시 재외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목 놓아 아리랑을 부르며 응원했어요. 타지생활에 무기력하기만 하던 제게 자신감과 용기를 넣어줬던 계기가 됐어요.

한: 유랑단에서 단장님은 어떤 역할을 맡으셨나요?
문: 전체적인 프로그램 진행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외국 나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길을 잘 파악하는 것이죠. 숙소까지 안내하는 역할, 단원들의 짐꾼, 식사결정권을 맡고 있어요.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들이에요!

한: ‘아리랑 유랑단’을 창단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나요?
문: 아무래도 단원들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어요. 저는 관광을 전공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국악이나 서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떻게 단원을 구성해야 아리랑을 쉽게 알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죠. 고민 중에 무작정 국악과가 있는 대학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어요. 다행히도 서울대 국악과의 많은 도움을 받아 대금과 판소리 하는 학생을 소개받을 수 있었어요. 그들과 함께 첫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한: 세계 일주를 하면 오랜 여행을 할텐데 단원들 사이의 갈등은 없었나요?
문: 생각보다 없었지만, 제가 예술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무지에서 오는 갈등이 조금 있었어요. 은연중에 쉽게 한 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리더로서 한 단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십과 서로에 대한 배려의 중요성을 느꼈죠. 단원들끼리 워낙 호흡이 잘 맞아서 큰 갈등은 없었던 것 같아요.
▲ 칠레 산티아고 세종학당에서 아리랑스쿨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문현씨우 페이스북

아리랑과 함께 한 세계일주
한: ‘아리랑 유랑단’의 첫 공연은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해요.
문: 처음으로 간 외국이 ‘베트남’이에요. 6명인 현재 유랑단과 달리 대금, 서예, 영상으로 팀을 꾸리고 간 첫 번째 여행이었어요. 지금처럼 많은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 일주를 준비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였던 여행이었어요. 우연히 베트남에 다녀오고 2주 뒤에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많은 축하메세지를 받았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더 확실히 세계 일주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한: 가장 보람을 느꼈던 때가 언제인가요?
문: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분들, 네덜란드 6·25 참전 용사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재외동포들이나 외국인들이 우리의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멋진 춤사위를 보여줄 때 큰 보람을 느꼈어요.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그들에게 힘이 되기도 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더 큰 힐링을 받아서 뿌듯하고 감사했어요.

한: ‘아리랑 유랑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인가요?
문: 부산에서 시작하는 ‘아시안 하이웨이’에 대해 알고계신가요? 일본, 한국, 중국, 인도, 터키 등 32개국을 경유하는 고속도로망이에요. 우리의 목표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통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에요. 북한청년과 남한청년이 만나 이야기를 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한, 과거 조선통신사가 갔었던 루트를 통해 일본학생들과 서로의 문화를 교류해보는 프로그램 등 문화로 다른 나라와 교감을 할 수 있는 단체가 되는 것이 목표에요.

자신의 키워드를 찾아라
한: 단장님의 학창 생활이 궁금해요.
문: 어렸을 적 가정의 문제가 생기면서 방황을 하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 됐어요. 방황하면서도 저를 지탱해주던 것이 있었어요. 바로 남자 승무원이라는 꿈이에요. 공부도 안 하고 철없던 시절 꿈이 있었기 때문에 더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때의 방황이 제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대학을 목표로 억지로 공부하지 않아도 됐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철없던 시절 꿈과 어릴 적 아리랑이 만나 지금의 아리랑 유랑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한: 많은 대학생이 자신의 꿈보다는 취직을 목표로 공부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많은 경험을 해보고 난 뒤에 자신에 맞는 직장을 찾아 도전하는 것을 권하고 싶어요. 젊음의 특권은 방황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바로 취업에 도전하는것 보다는 좌절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는 경험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여행에 여러번 선발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문: 자신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는 거에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얘기는 많이 알지만 정작 본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 자신의 핵심 키워드를 찾고 그것을 브랜드화하거나 연결 시키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 때 본인이 원하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있고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어요.

한: 단장님의 최종목표와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문: 아리랑 유랑단 활동으로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느낀게 있어요. 그 나라에 사는 재외동포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장구를 치고 싶지만 장구가 없어, 장구를 박스로 대신했어요. 단장으로서 정말 안타까운 장면이었어요. 우리 유랑단이 일회성 단체가 아니라 앞으로도 이런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고 문화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문화정책 단체가 됐으면 해요. 앞으로 아리랑 유랑단 뿐만 아니라 한글 유랑단등 다양한 문화 브랜드를 런칭해서 우리나라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사진 김은영 기자   young5412@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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