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돌아가더라도 진심이기를
조금 돌아가더라도 진심이기를
  • 금혜지 편집국장
  • 승인 2014.01.03
  • 호수 13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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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어색하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룸메이트에게 고향을 물어봤을 때, 처음 신문사에 들어오기 위해 면접을 봤을 때처럼. 노트북 모니터에 장산곶매라는 제목을 띄우고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아주 어색하다. 처음이라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 때의 룸메이트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수습기자가 편집국장이 되기까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뭘까. 기나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 치고는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여유’라는 것이다.

우선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의 SNS에서 화제가 된 ‘픽업아티스트’에 관련된 논란이다. 자칭 픽업아티스트는 본인을 “이성에게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혹은 “이성 관계에서의 기술을 예술의 경지에 올린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소심하거나 이성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한 달 4백만 원가량의 수강료를 받고 ‘연애의 기술’을 강의한다.

픽업아티스트는 만남의 기술을 돈을 받고 판매한다. 그 기술이라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그쪽 뒤통수가 정말 귀엽게 생겨서요”라는 작업용 멘트를 수강생들에게 연습시킨다. 그리고 ‘만남은 게임이다’라는 자기최면을 끊임없이 부여한다. 이런 방법으로 여성의 번호를 얻어내거나 그 이상의 작업을 성공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길거리·나이트·클럽에서 이성의 번호를 받아 내는 쾌감과,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나와 같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설렘. 감정에 가치를 매길 수 있다면 후자의 설렘은 분명 4백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쾌감의 무게는 너무도 가볍다. 거절을 당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것에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데 기술이 있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충분한 시간과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배워 나가는 것일테다.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깝고 조급했으면 거금을 들여 이성을 ‘픽업’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인가 싶다. 사람들은 가장 신중해야 할 사랑에 관련해서도 조급함을 느끼는 듯하다. 일회성 연애를 코칭해주는 사업에 수요가 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기괴한 현상이 아니더라도, 조급함을 강요받는 분위기는 대학생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던 부분이다. 여태까지 많은 동기들, 후배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기자 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봐 왔다.

후배 기자들에게 왜 그만두고 싶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대답을 요약하자면 ‘내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에 대한 당장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할 수 있다.

벌써부터 고시를 준비하거나 여러 가지 대외활동을 하고, 공모전에서 상을 타 오는 동기들을 지켜보며 신문사 일에 시간을 쏟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불안해하는 기자들에게는 ‘한 학기, 1년 정도의 여유만 자신에게 준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선배 기자들의 조언도 소용이 없다.  ‘청춘은 원래 아프다’라든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는 위로와는 다르게, 여유는 자신이 맘먹지 않는 이상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1년 늦게 입학한 절친한 친구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3학년은 ‘사망년’이라던데, 이제 너는 대학생이 아니라 ‘취준생’이다”라며 놀려댔다. 남들이 우리 나이를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적어도 올해까지는 느긋하겠다.

‘픽업’이 아닌 사랑을 하고, 취업 준비보다는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가끔씩은 빠른 길보다는 느린 길로 걷기를. 2014년은 우리에게 그렇게 지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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