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왠지 친근한 얼굴들
낯설지만 왠지 친근한 얼굴들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11.30
  • 호수 13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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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한글 야학 김승력 선생님

혹 러시아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관해 알고 있는가. 일제강점기 외압을 피해 연해주에 살다 스탈린의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해 황무지에 삶의 씨를 뿌리던 한국 사람들. 그들은 현재 ‘고려인’이란 이름으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 김승력 선생님은 고려인 최대 밀집 지역인 안산에 시민단체 ‘너머’를 세우고 한글 교육, 상담 등 다양한 활동 중이다. 인터뷰 동안 끊임없이 상담소를 들락날락거리는 고려인을 맞이하느라 기자와는 한국말로, 고려인들과는 러시아어로 답하는 선생님이 마치 두 사람처럼 느껴졌다. 피곤함에 지친 몸도 모른 채, 마음은 항상 분주한 김승력 선생님을 잠시 불러 세웠다.

“삶의 고민 끝에 도착한 러시아 땅”
한대신문(이하 한): 러시아에 가게 된 이유는?
김승력 선생님(이하 김): 제가 러시아에 갔던 시기는 딱 서른이 되던 해였어요. 대학 졸업 후 회사 생활을 했는데 문득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걸까란 고민이 되더라고요. 지금은 돈 벌 때가 아니라 이 고민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부터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에 관한 환상이 있었는데 그곳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방법을 찾던 중, 우연히 연해주 한 사범대학에 한국어과가 생긴 거예요. 강사를 모집한다고 해서 한국어 강사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생활하다 고려인 사회를 만났어요.

어느 날 고려인 현황을 알아봐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고려인들은 러시아 군인들이 철수한 빈 막사에 몇백 가구가 들어와 살았어요. 추운 연해주에서 겨울은 나게 하자고 월동 지원 활동을 시작 했죠. 그 일을 시작한 게 계기가 돼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한: 뜻밖의 일로 고려인과 만난 거네요.
김: 그렇지. 처음에는 이분들 상황이 다급해서 돕게 됐는데 점점 궁금해져 고려인에 관해 공부하게 된 거죠. 그동안 내 고민이 사치였다고 느껴졌어요. 당장 이렇게 어려운 분들이 있는데 뭐가 옳게 사는 거고,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는지에 관한 고민이 사치란 생각이 들었죠.

한: 고려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나요?
김: 처음에는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정착하는 걸 도왔어요.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난방용품, 쌀, 이불, 전기세 등을 지원하는 일을 했죠. 그리고 당시 연해주에 고려인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줄 센터가 없었어요. 또 이 분들 스스로 운영하는 청년 단체가 필요해서 ‘후대’라는 고려인 청년회를 만들었어요.

한: 고려인들은 선생님과 아무 상관도 없었던 곳이잖아요. 그런데도 이곳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든 거예요?
김: 처음엔 당연히 모두 걸겠다는 생각은 안했지. 러시아에서 대학원에 다니려는 계획이 있었어요. 그런데 고려인들의 월동 준비를 도와주며 간단한 문제로 해결될 일이 아니더라고.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국적, 정착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누군가는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연해주에서는 나밖에 없었으니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한: 연해주에서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연해주에 이 분들을 위한 거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이룬 이후 어떤 걸 더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러던 중 러시아에서 비자 기간이 다 돼 다시 갱신하러 한국에 나간 사이 러시아에 입국 금지가 되는 바람에 다시 못 들어가게 됐죠.

한: 왜 못 들어가게 됐죠?
김: 연해주에 고려인 센터를 만들고, 고려인 정착 마을을 만드는 일을 했잖아요. 러시아 정부기관 KGB에서 보기에 앞으로 당국에 분쟁이나 위기 상황이 왔을 때, 반동 집단을 움직일 수 있는 위험 분자로 생각한 거죠. 그 때문에 비자 갱신하러 한국 갔을 때 막아 버렸죠.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김: 아무래도 안구 암을 치료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작년 봄에 한 고려인 엄마가 애기를 안고 찾아 왔어요. 애기가 안구 암에 걸렸는데 수술 받지 않으면 뇌로 그 암이 번져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치료비를 갖고 왔는데 턱없이 모자랐지. 방법이 없어 일단 되는 만큼 저희가 노력해서 돌려드리겠다고 보냈어요. 그래서 500만원을 목표로 다음 아고라에 사연을 올렸는데 순식간에 거의 2-3000 만원을 모았어요. 덕분에 애기가 무사히 수술받고 돌아갔어요. 그 때 세상에 좋은 분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죠. 

한: 고려인분들 중병에 걸린 사람은 많나요?
김: 체질상 그런 건 아닌데 치료비가 없어 적절할 때 치료를 못 받는 게 문제인 거죠. 또 말을 못하니 치료 과정이 더 어려운 거고. 일단 의료보험이 안되는 게 문제에요. 한국인들에 비해 200%이상 비싸요.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거죠.

한: 이외에 또 어떤 문제가 있나요?
김: 비자 문제가 가장 심각해요. 동포들이 여기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비자 정책이 고려인들의 상황에 실질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많아요. 한국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고, 고려인들은 한국 사람들도 외면하는 3D업종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어요. 이런 문제 때문에 고려인 동포들이 모국에 관한 거리감을 느끼는 거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해요. 

한: 고려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
김: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다 드라마예요. 그 중에 ‘리 안드레이’라는 고려인 친구가 있는데 함께 연해주에서 청년회를 만들었어요. 2010년에 제가 러시아에 못 들어가게 되면서 차라리 시골에 들어가 글을 쓰려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찾아온 거예요. 친구와 함께 우연히 안산의 땟골을 알게 됐는데 여기도 상황이 연해주만큼 심각하더라고. 그냥 두고 볼 순 없지 않느냐는 안드레이의 제의에 따라 시작한 게 지금의 ‘너머’가 된 거지. 그 친구가 가장 고려인 중에서는 내게 소중한 친구예요. 현재 너머의 공동대표이기도 해요.

한: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오는 이유는?
김: 소련이 와해되면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들이 다 독립했어요. 독립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회복한다고 고려인들을 배척한 거죠. 하루아침에 갑자기 러시아어 대신 우즈벡어를 공용어로 쓰고, 농장의 주인으로 있던 고려인들은 다 쫓겨났어요. 다시 떠돌이가 됐지. 그중에 일부는 옛날에 살던 연해주로 온 거죠.

“한국인을 한국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한: 고려인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나요?
김: 무슨 일이든 상대적이에요. 가족이 있으면 많은 부분을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하니 꿈이나 자유를 잃게 되잖아요. 뭔가 선택함으로써 잃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있어야 해요.

한: 혼자 살면 외롭지 않나요?
김: 삶 자체가 외로운 것 같아요. 결혼했다고 안 외롭나요, 조금 덜 외롭겠죠. 다만 새롭게 든 걱정은 있어요. 최근 TV에서 ‘고독사’에 관한 내용이 나왔는데, 그걸 보며 혼자 살면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한: 너머처럼 시민단체 활동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먹고살죠?
김: 규모가 꽤 되는 시민단체는 작은 월급이라도 나와요. 하지만 아예 그런 월급조차 안 나오는 데가 많아요. 저희 단체는 정부운영지원비도 안 받아서 다 사비로 운영했죠. 지금은 후원금 늘어나면서 최소한의 활동비 정도는 있어요. 그래도 그걸로 생활이 되진 않았죠. 시민단체 활동하려면 돈보다 자기 일에 대한 가치를 갖고 사는 거예요.

한: 고려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김: 엊그저께 술 마시다 한 고려인에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즈베키스탄 사람과 얼굴이 비슷해 말 배워서 살 수 있어요. 근데 한 번도 자기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사는 게 자랑스러웠는데 한국에 들어오니 아니더라는 거죠. 현재 한국인과 모습이 다른 건 이분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한국 또한 엄청나게 서구화됐어요. 서로 많이 변했죠. 근데 우리가 올바른 것인 양하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한: 앞으로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김: 딱히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그 미래를 잘 준비하는 일이 현재를 열심히 사는 거로 생각해요. 미래를 고민하느라 막상 현재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의 하나지만, 전 현재를 충실히 사는 데 더 가치를 두고 싶어요.

일러스트 손다애 기자 sohndaae@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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