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병동 철제 침대 위에 따스한 단비를 적시다
차가운 병동 철제 침대 위에 따스한 단비를 적시다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10.01
  • 호수 13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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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 암병원 중환자실 김단비 간호사

늦은 밤, 한 병동에서 하얀 의복을 입고 온종일 누워있는 환자 곁을 지키는 간호사가 있다. 그는 환자사이를 돌아다니며 벗겨진 환자의 이불을 다시 덮어준다. 그런데 왠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간호사의 이미지와 다르다. 상냥하고 고울 것 같은 간호사와 달리 거칠고 투박한 손,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의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남자 간호사가 천 명을 넘긴 시대, 이런 광경은 더 이상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다. 서울의 한 암 병동에서 일하는 김단비 간호사의 일상일 뿐이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란 생각도 들었다”
한대신문(이하 한): 간호사는 병원에서 무슨 역할을 하나요?
김단비 씨(이하 김): 일단 가장 중요한 건 환자의 상태를 감지하는 일이에요. 24시간 내내 환자 옆에 붙어서 실시간으로 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환자의 상태를 의학적 지식으로 판단해야 하죠. 그 후에, 의사와 상의를 통해 추가적인 처방이 들어가는 거예요. 결국 간호사는 병원의 최전선에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죠.


한: 간호사는 매번 일하는 시간이 바뀐다고 들었는데, 특히 야간에 일하면 힘들진 않은지
김: 매일 일하는 시간대가 바뀌기 때문에 생활이 불규칙하죠. 또 저희가 8시간 근무하는데, 실제는 11시간을 일해요. 왜냐면 환자의 상태를 미리 파악해야 하거든요. 또 일이 다 끝난 후에는 내가 완전히 일을 끝내기까지 시간이 또 필요해요. 다음 교대에 일하는 간호사에게 제가 해야 할 일을 넘기지 않으려고 정해진 시간 이상으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보통 자는 시간 외에는 일한다고 보시면 돼요.

한: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특히 신경이 쓰이겠어요.
김: 그렇죠. 근무하는 내내 긴장 상태에요. 더군다나 암 병원 중환자실은 강도가 더 해요. 이곳에서도 암 병동이 환자 사망률, 심폐소생술(CPR) 발생률이 1위에요. 게다가 간호사 사직률도 1위고요. 이쪽 일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일의 강도가 높아요. 그래서 간호사 교체율도 높고, 연차도 낮은 편이죠.

한: 간호사 사직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간호사는 사람을 살려내는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이 병동에서 일하다 보면 약을 써도 환자의 상태는 달라지는 게 없고, 심지어 사망하는 일도 자주 봐요. 그걸 되풀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기력함이 느껴져요.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란 생각도 들고, 어떤 노력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거죠. 사실 암 병동 중환자실로 오는 환자분들은 어느 정도 마지막까지 가신 분들이에요. 그런 일을 겪는 게 꼭 간호사 탓은 아니지만, 이 직업이 가진 숙명적 딜레마죠.

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언제에요
김: 지금은 조금 적응된 일인데, 제가 맡은 환자의 죽음을 처음 경험했을 때요. 이미 암이 온몸에 퍼지신 분이라 그렇게 가시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는 마치 저 때문에 환자가 죽은 것 같았어요. 환자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돼 죄책감이 들었어요. 한동안 펑펑 울었죠.

한: 그런 환경에서 단비 씨는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김: 당연히 저도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죠. 그래도 몸은 힘들어도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의학 공부를 하며 얻은 지식으로 환자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또, 해결책을 찾을 때 뿌듯함을 느껴요. 그 순간에 제가 성장해가는 걸 느끼죠.

한: 공부한 것들이 바로 실전에 적용되고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일에 재미를 붙이셨네요.
김: 그렇죠. 제가 아는 게 많아질수록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또 다른 간호사보다 제가 더 빨리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 성취감을 느껴요. 재밌어요. 그거 하나로 버티는 거예요.


“간호학과에 처음 발 들인 계기는 예쁜 간호사 누나들 때문”
한: 왜 간호사가 되려고 결심한 거예요?
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직 딱히 꿈이 없었어요. 근데 당시 계명대에서 탐방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친구가 간호학과에 예쁜 누나가 많다며 그곳으로 탐방을 가자고 했어요. 그렇게 처음엔 장난으로 가게 됐죠. 탐방 중에 교수님과 면담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는 여자 간호사는 많지만, 남자 간호사는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특히 준비된 남자 간호사는 없는 것 같다며 이 분야에서 준비된 남자 간호사라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셨죠. 듣고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거예요.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 같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준비하면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 그럼 그 교수님의 말을 듣고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김: 또 제 이름이 ‘김단비’잖아요. 미신 같아도 사람은 이름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은연중에 단비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간호사가 된다면 환자 옆에서 단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두 가지가 맞물려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죠. 이후 그때 탐방한 대학에 입학하게 됐는데 저와 면담한 교수님은 잘 기억하지 못하시더라고요.

한: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어땠어요?
김: 저희 어머니는 찬성했는데 아버지가 인정 못 했죠. 무슨 남자가 간호사냐 헛소리 마라 하시고. 제가 간호학과 가기에 점수가 모자랐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모의고사 성적이 100점 정도 올랐어요. 그때 제 진정성을 봐주셔서 아버지가 허락하셨죠.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반대가 심하셨죠.

한: 혹시 자식 중에 본인만 아들이에요?
김: 네, 저만 아들이었어요. 그러니 할머니 반응은 당연했죠. 그래도 마지막 가실 때 저 보고 잘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어요.

한: 그래도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좋다는 삼성서울병원에 들어갔고, 남자 간호사라는 점 때문인지 여러 언론에도 나오셨잖아요. 나름 성공한 인생 아닌가요.
김: 하하하…. 그렇죠, 이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어요. 일찍 돈을 벌고 싶었는데 이제는 직접 번 돈으로 부모님 해외여행을 시켜 드리게 돼서 뿌듯해요.

“능구렁이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한: 아무래도 ‘간호사’는 주로 여자를 떠올리는 직업이잖아요. 남자 간호사는 드문데 남자라서 힘든 점은 없나요?
김: 남자가 없다 보니까 무슨 일을 하면 주목을 많이 받아요. 이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지요.

한: 조직에 여자가 많아서 적응하기 힘들진 않았나요?
김: 이건 사람에 따라 달라요. 진짜 남성적인 사람은 여자의 섬세함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 해서 부딪히는 일이 잦아요. 그런데 저는 딱히 남녀의 문화가 구분이 안 돼요. 남자끼리 있을 때는 같이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시는데, 또 여자들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여성분들은 맛집 탐방이나 쇼핑, 결혼 얘기를 주로 하던데요. 그들과 있을 때는 또 그 문화에 적응하죠. 어떻게 보면 1등 신랑감 아니에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저는 문화 구분 없이 잘 섞이는 편인 것 같아요. 

한: 누나나 여동생 없어요? 만약 있다면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김: 어, 좀 그런 것 있어요. 누나가 있는데 엄청 남자 같아요. 저는 막내인데 반대로 애교도 많고 말도 많아요. 여자 문화에 거리낌이 없는 게 그런 점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좀 능구렁이 같다고도 하는데 어느 곳에서 있어도 능글능글하게 잘 동화되는 편이죠.

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매우 다르잖아요. 남자 간호사와 여성 간호사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김: 일단 다른 성별 이전에 같은 간호사라 비슷한 일을 해야 하겠지만, 각기 쓰일 수 있는 곳은 다를 것 같아요. 남자 간호사에게 여자 간호사가 해 왔던 것을 그대로 모방하라는 요구는 옳지 않다고 봐요. 분명 남자 간호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남자란 성별이 가치 있을 때가 있어요. 누가 누구를 보조해 주는 관계가 아닌, 서로 다른 성향이 함께 가기를 원해요.

한: 간호사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나 인생의 목표가 있나요?
김: 뭔가 딱히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비전은 있어요. 아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간호사요. 왜냐면 제가 대학 시절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교수님께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감사해서 교수님께 곧 다 갚겠다고 하자 “내한테 갚을 필요 없고, 니 후배에게 갚으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거든요. 그 후로 제 후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간호사가 제 비전이에요.

자신이 도움을 받은 만큼, 내리 사랑을 전하겠다는 김단비 간호사. 그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후배 간호사에게, 병동의 환자들에게 그가 받은 사랑을 전할 것이다. 아니,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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