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 이순임<교목실> 교목
  • 승인 2013.04.01
  • 호수 13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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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인 사망 선고 시각은 심장박동이 멈추는 때이지만, 심장이 뛰고 있고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더라도 삶이 삶다워지려면 제대로 기능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삶이 삶다운 활기를 잃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살맛이 안 나요.”,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삶이 삶다우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내면에서 물음표와 느낌표가 왕성해야 한다. 만나는 것마다 궁금한 것들 투성이 여야하고, 알고 싶은 것이 천지에 가득한 ‘호기심 천국’의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면 인생은 드라마틱한 여정이 될 수 있다.

어느 봄날 돋아난 새싹들을 보고 수많은 물음표들이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에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던 경험이 있다. 생명은 곧 물음표 자체라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듯 한 새싹들의 행진에 누가, 왜, 어떻게 그런 생명의 퍼레이드를 그 작은 한 점 씨알들 속에 숨겨놓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음표와 느낌표,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동물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물음표와 느낌표들은 생명의 절정기인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그런 물음표와 느낌표를 까맣게 잊어먹고 살아간다. 어쩌다 물음표가 싹을 내밀어도 “먹고 살기 바쁜데 너 따위가 뭘 하러 고갤 내밀어?”하고 묵살하면서 물음표의 숨통을 끊어버리기가 일쑤이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인 사망선고나 다름없다는 것을 까마득히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인류 역사가 날로 새로워지고 풍요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왕성하게 살아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덕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개 숙일 줄 모르고 물음표의 행진을 계속했던 사람들 덕분에 인류의 호기심은, 느낌표의 선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물음표가 없는 인생에게는 그 어떤 느낌표도 찾아올 리가 만무하다. 똑같은 영화 간판을 보고서도 ‘뭐 별게 있을라구?’와 같은 물음표 아닌 물음표만 붙이고 살아간다면, 그 인생도 늘 그 인생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왜 만들었지? 무슨 마음으로 만들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라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열정과 동기에 궁금증을 가져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만사에 관심을 가져줄 때, 나에게도 누군가가 사랑과 관심을 쏟아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관심은 우리에기로 와서 마치 고목에 새순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새싹을 틔울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말로만 쏟아내는 사랑과 관심은 무의미하다. 매순간 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을 치밀하게 채워가는 연습과 노력을 통하는 길만이 물음표를 제기할 수 있고 느낌표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안에 꼭꼭 숨어 있던 물음표와 느낌표가 활개를 치며 생동하는 삶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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