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디자인의 뿌리, 바우하우스
현대 디자인의 뿌리, 바우하우스
  • 강지우 기자
  • 승인 2012.11.17
  • 호수 13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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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심미성에 기술의 실용성 더해
▲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의자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설립된 종합예술학교다. 바우하우스는 당대의 디자인을 실험·연구하는 예술인들의 장이었으며 현대 디자인과 조형 교육의 기원이라 할 정도로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우하우스는 건축, 공예, 미술 등의 영역에서 미적인 영역과 실용적 영역을 동시에 추구했다. 여기서 실용성이라 함은 단지 사용의 편리함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대량생산을 하면서도 많은 서민들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이 점은 현대에 와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한 문화운동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이경임<디자인대 금속디자인학과> 교수는 “바우하우스는 미술에 대한 교육과 특히 수공예 공방의 발달에 있어서 의의가 있다”며 “금속공예와 현대 가구디자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바우하우스는 실용성에 대한 목표는 있었지만 일관된 디자인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담당하던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디자인관에 따라 다양한 예술적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이유로 세 번에 걸쳐 지역을 옮기면서 외부적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운영 기간은 외부적인 영향으로 근거지를 이전함에 따라 3기로 구분된다. 1기(1919-1924)는 독일의 철학, 예술가들의 활동무대였던 바이마르에서의 기간이다. 나무, 도자기, 유리 공방 작업이 필수 과정으로 있었다. 대표적인 예술가는 그로피우스와 이튼이다. 설립가인 그로피우스는 수공예를 강조했으며 물질적 욕구보다 정신적 욕구의 충족를 중요시하며 합목적성과 심미성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튼은 예술과 산업적 측면에서의 디자인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연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했다.

▲ 바우하우스 2기의 금속공방
바우하우스는 보수주의적인 바이마르 지역의 압력에 의해 뎃사우로 이동해 2기(1925-1931)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바우하우스는 실생활 제품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을 확대했다. 당시 대표적 예술가인 칸딘스키와 클레는 순수 조각과 회화를 담당했는데 기본적인 형태는 물론 새로운 조형과 기능주의로까지 발돋움 했다. 교장이었던 마이어는 디자인의 기능성과 공공적 구조주의를 지향했다. 이는 그가 사회적 규범과 시민들의 예술적 궁핍을 개선하고자 한 사회주의적 디자인으로 발달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 학생들과 정치 조직을 이끌게 되는데 예술가들과의 마찰이 생기고 나치로부터 경계를 받는데 이에 바우하우스는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3기(1932-1933) 때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중심으로 다시 개교했으나 정치·경제적 어려움으로 1년 만에 해체된다. 이때 활동한 파이닝어는 실생활에서의 표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며 사고의 교환을 중시했다. 그의 교수법은 학생들이 자율적·창의적 사고를 하도록 이끌어 독일 디자인의 큰 특징이기도 한 팀워크 디자인의 시초가 됐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14년의 짧은 기간동안 내·외적 혼란을 겪었지만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디자인 발전에 영향을 줬다. 사회학자 겸 디자이너인 부르크하르트는 “바우하우스를 수용하지 않고서 디자인의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바우하우스를 평가했다.

참고: 논문 「현대 디자인과 조형교육의 기원인 바우하우스 사람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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