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매표소] 나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대학로 매표소] 나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 노영욱 기자
  • 승인 2012.11.15
  • 호수 13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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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수사극 속에 숨겨진 가족을 향한 사랑, 연극 「1월 40일」
▲ 형사와 여검사가 살인자를 찾기위해 이경수와 면담을 하고 있다.
지난 6일 연극 「1월 40일」이 공연되고 있는 아트센터 K 세모극장을 향했다. 혜화역 1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켠 채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맨 후 마침내 극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극장 건물은 다른 대학로 극장들과 달리 꽤 크고 새로 지어진 듯했다. 그런데 극장 주변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닐 것 같은 벤들이 유독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뭔가 싶어 극장을 향해 가니 아니나 다를까 극장 앞마당에는 연예인들을 위한 포토존이 마련돼 있었다. 하나 둘씩 연예인들이 도착하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동료 배우를 응원 나온 배우들을 보니 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져 갔다.

객석에 들어서자마자 무대가 커다랗게 보인다. 왜 이렇게 무대가 크게 느껴질까 생각해보니 다른 소극장들에 비해 객석의 폭이 매우 좁았다. 대충 어림잠아 무대 폭의 절반 정도밖에 안돼 보였다. 배우들의 연기를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띄었고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었다. 무대 바닥은 체스판과 같이 흰색과 검은색 사각형이 번갈아 배치돼 있는 모양이다. 연극의 장르가 범죄 추리극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가서 그런지 형사와 범죄자가 마치 서로 체스 게임을 하듯 겨룰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별다른 무대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추리극을 아무 배경도 없는 공간에서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궁금해졌다. 무대 구경이 끝날 때쯤 객석이 관객들로 차자 극장 안은 암전되고 극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 나왔다

▲ 이경수가 자신이 생각한 용의자 중 한 명인 가정 도우미에게 범행 사실을 추궁하고 있다.
극의 시작은 이 연극의 모티프가 된 시 「해바라기의 비명」이다. 무대 정면으로 보이는 벽이 하나의 큰 스크린이 돼 시의 행 하나하나가 나타난다. 시가 다 나타난 뒤 기분 나쁘고 음산한 음악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화면엔 한 죄수가 범행 당시를 읊조리는 영상이 나온다. “그녀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어. 빨간 코트를 입고.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쥐고.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그녀를 쫓았어.” 영상이 끝나고 어느새 무대 가운데에는 방금 동영상에 나왔던 죄수가 등장해 한 여자와 함께 범행 당시를 재연한다. “그리고 그녀가 현관문을 연 순간 난 이미 그녀와 함께 있었어.” 죄수의 광기어린 독백은 빨갛고 파란 조명, 여전히 흘러나오는 음산한 노래와 어울려 관객을 단숨에 압도한다.

죄수가 사라지자 마치 드라마 오프닝을 보듯 무대에는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등장해 포즈를 취하고 한 명씩 사라진다. 그리고는 다시 형사가 등장해 본격적인 극이 시작된다. 형사는 경찰서로 추정되는 곳에서 물티슈로 의자를 닦으며 아무도 청소를 안 한다는 것에 연신 투덜댄다. 이 때 한 살인사건에 대한 반장의 전화가 오고 형사는 그 사건을 한 여검사와 함께 처리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형사는 반장의 지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검사가 언론에 노출돼 유명할 뿐, 능력이 부족함은 물론 얼굴까지 못생겼다며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 순간 방금까지 욕을 했던 여검사가 오른쪽에서 등장하고 형사는 당황하며 검사를 맞이한다.

“1월 30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동생 둘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살인의 흔적,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사라진 뒤 아무런 연락이 없자 유일한 생존자 아들 이경수가 4일 뒤 신고를 했습니다.” 형사는 검사에게 극의 중심 내용이 되는 살인사건의 조사경과를 보고한다. 형사는 정신병자와 같은 행동을 보이며 가족의 실종 직후 신고를 하지 않은 이경수를 줄곧 용의자로 지목한다. 검사는 이것저것 조사를 더 해보자는 얘기를 한 후 무대에서 사라진다. 무대에 남은 형사는 검사가 흘리고 간 과자를 치우며 다시 검사의 험담을 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그런 형사의 언행에 웃음을 터트린다.

사건의 수사를 위해 이젠 생존자 이경수와 형사, 검사가 함께 면담을 한다. 검사는 이경수에게 그에 대한 신상을 이것저것 물으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려 하지만 형사는 여전히 “니가 죽였잖아, 시체 어디 있어”라며 이경수를 몰아세운다. 이에 이경수는 “내가 죽이지 않았어”라고 매우 흥분하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용의자 다섯 명이 적힌 수첩을 검사에게 건네며 자신이 범인을 잡게 도와 달라 간청한다. 검사는 이를 받아들이고 형사와 함께 이경수의 집에 잠복해 이경수가 용의자 한 명 한 명을 만나는 장면을 직접 지켜본다.

옆집 아주머니, 아버지의 친구, 어머니의 친구, 동생의 담임선생님, 그리고 가정 도우미. 이 다섯 명의 용의자들이 모두 각자가 지닌 사연으로 인해 설득력 있는 범행 동기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 와중에 홀로 남겨진 이경수의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져만 간다. 각 용의자와의 대화 사이, 집에 홀로 남겨진 이경수는 가족이 있는 듯 행동하거나 혼자 역할극을 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표출한다. 이경수의 오열이 과해지는 모습을 통해 관객은 그의 괴로움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관객은 용의자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과연 누가 범인인지를 추측하며 극을 감상한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왜 이 연극의 제목이 ‘1월 40일’인지, 모티프가 된 시 「해바라기의 비명」이 어떻게 극 속에 녹아들었는지, 이경수는 왜 외로울 수밖에 없었는지. 마치 안 풀리던 문제가 풀리고 맞춰지지 않았던 퍼즐이 한순간에 맞춰지듯 말이다.

사진 제공: PY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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