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티 섬에서 만난 검은 몸의 마리아
타이티 섬에서 만난 검은 몸의 마리아
  • 정혜원 수습기자
  • 승인 2012.11.10
  • 호수 13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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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이아 오리나 마리아」
▲ 검은 피부의 아이와 여자를 향해 두 여인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새하얀 피부의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성스럽고 엄숙한 느낌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떠올릴만한 종교화의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 검은 피부의 마리아와 예수가 그려진 그림이 있다. 더구나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은 성스러움보다는 관능미가 강조된다. 이 그림이 바로 당시 파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문제작, 폴 고갱의 「이아 오리나 마리아」이다.

산업혁명이 발발하던 19세기, 고갱은 도시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갱이 찾고자 한 것은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이었다. 이런 갈망은 고갱을 타이티로 향하게 했다. 타이티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종교와 미신에 따라 생활하는 모습은 고갱에게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고갱은 타이티에서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수많은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이 중 「이아 오리나 마리아」는 특별히 종교적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이아 오리나 마리아’는 타이티어로  ‘마리아여, 당신께 예배를 드립니다’라는 뜻이다.

검은 피부의 여자와 아이, 가슴을 드러낸 채 기도하는 두 여인, 신께 바치는 야생 과일 등  「이아 오리나 마리아」는 기존의 종교화에서 볼 수 없는 장치들을 묘사하고 있다. 고갱은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두 사람의 타이티 여자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그린거야. 마리아도 예수도 역시 타이티 사람이지’라고 그림이 내포한 종교적 의미를 편지를 통해 밝혔다. 그 후 타이티로 떠난 지 2년 만에 고갱은 타이티에서 그린 작품을 들고 파리로 돌아온다. 그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타이티 체류 시절의 기록인 「노아 노아」를 출간하고 타이티에서 그렸던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실패한다. 그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타이티 원주민의 모습인 마리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갱은 스스로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정통적인 성모자상을 가장 친근한 타이티 여인의 모습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어떤 성상화보다도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즉 고갱은 벌거벗겨지고 못생긴 인물들이야말로 미화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후기 인상학파 화가로서 작가의 주관과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이로 인해 고갱은 자신의 주관에 의한 감상과 개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이아 오리나 마리아」는 색을 이용해 원근을 표현한 작품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그림 속 평면적 공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고갱은 입체감과 거리감, 질량감을 나타내기보다는 생동력 있는 형태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런 고갱의 노력은 서양의 전통 그림 양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이정순<생활대 의류학과> 교수는 “고갱은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묘사하는 대신에 색채 변화와 형태의 왜곡을 통해 그의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며 “색채를 그림의 생명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고갱은 파리에서의 개인전이 성공하지 못하자 절망감을 안고 타이티로 돌아왔다. 타이티로 돌아온 고갱은 술과 자유분방한 생활로 매독에 걸리고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한다. 고갱의 그림이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은 당시 유럽 사회가 성서의 내용을 토속신앙과 결합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아 오리나 마리아」는 원시의 순수 속에서 새로운 마리아와 예수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재평가 되고 있다.

참고: 논문 「기독교와 미술 영원한 자유인 폴 고갱」  , 프로그램「명작 스캔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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