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연구의 윤리성 논란의 법학적 해석
학문연구의 윤리성 논란의 법학적 해석
  • 한대신문
  • 승인 2006.03.26
  • 호수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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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정 규 원 <법대·법> 교수
최근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학문적 정직성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필자는 묘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필자가 느끼는 첫 번째 혼란스러움은 무력감에서 비롯된다.

생명과학을 비롯한 과학의 인문·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특히 인간유전체연구(Human Genome Project)에서 비롯된 윤리적, 법적, 사회적 함의(ELSI : Ethical, Legal, Social Implications)연구는 이제는 생명과학연구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국내·외의 많은 단체와 학회 등이 과학연구에 대한 윤리지침들을 발표하여 왔다. 국내에서는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이 2005년부터 시행하여 생명과학을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법적 차원에서 규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하여 필자는 결국 윤리나 법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을 느낀다.

필자가 느끼는 두 번째 혼란은 연구자들의 부정직이나 비윤리성이 아니라 그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측에 대하여 느끼는 것이다. 학문연구의 윤리성이나 학문적 정직성은 학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그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연구의 윤리성이나 학문적 정직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학문적 활동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을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문적 부정직성과 비윤리성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몇은 스스로가 현재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들에 못지않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연구비를 받고 아무런 연구결과를 제출하지 않는다든지, 로비를 통하여 연구비를 받는다든지, 연구비 나눠먹기가 불문율로 지켜지는 것이라는지. 심지어는 과학연구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이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비를 얻어내려는 전략으로 이용되기까지도 한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이나 집단들끼리 뭉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배제시키거나 “혼내주라”는 식의 결의를 하기도 한다. 과연 윤리나 규범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윤리적 주장이나 법적 주장은 학문적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며 주장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윤리교육을 받지 못하여 윤리규범을 따르지 못하였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윤리나 법을 전공하거나 이를 주장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직업을 뿐이다.” 언젠가 들은 “윤리학자가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윤리학자의 발언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여야만 하는 것인가?

과학적 결과는 일반적으로 다른 과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그 진위가 판별된다. 그에 반하여 윤리나 법과 같은 규범적 영역의 주장은 아마도 논리적 논증을 통하여 사람들을 설득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들은 논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저 목소리 크거나 정치적 영향력이 있거나 다수의 패거리를 거느리고 있는 집단의 주장이기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닌가? 인문·사회과학은 위기가 아니라 아직 탄생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필자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왜 운전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물으면 필자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좋아서”라고 대답하여 왔다. 그런데 동일한 장소를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거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지나가다 보면 생소한 풍경에 놀라곤 한다. 운전을 하다보면 교통진행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로 앞만을 바라보다 보니 정작 옆으로 지나치는 풍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그곳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는 착각과 만족으로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멋진 답변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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