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爾) - 대중의 존경받는 언론이 되기 위하여
이(爾) - 대중의 존경받는 언론이 되기 위하여
  • 한대신문
  • 승인 2006.03.26
  • 호수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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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이었다.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뒤틀린 시각으로 폭정을 일삼은 그는 역사를 통해서도 오래도록 부정적으로 해석되어 오고 있다.

자신의 광기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연산군의 앞에 어느 날 장생과 공길이라는 광대가 나타난다. 궁중의 광대인 그들은 탈을 쓰고 탐관오리의 흉내를 낸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爾)’라 부른다.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장생과 공길의 놀이패는 신명나는 가락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고 신이 난 연산군은 대신들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즐기라 한다. 순간 한 대신이 손을 떨며 술잔을 놓친다. 놀이판 탐관오리의 원형이 된 대신이다. 왕은 그제서야 그 놀이판이 현실의 반영임을 깨닫고 장생과 공길이 연기한 탐관오리가 그 떨고 있는 대신임을 눈치 챈다. 당장 그에게 벌을 내리라는 어명이 떨어지고 장생과 공길에 의해 고발된 탐관오리는 자신의 죄 값을 치르게 된다.

 요즘 네티즌들은 쉽게 흥분한다. 얼마 전 자신의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지하철에서 내린 한 여대생은 사진과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전 네티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네티즌들을 통한 사이버 응징은 마치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며 테러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해야만 한다. 처음에 네티즌들은 정의감에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사이버 응징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그 본질은 사라지고 인신공격과 테러라는 결과만 남게 되었다. 집단적으로 한 개인을 응징하는 사이버 속 대중은 조선시대 연산군과 닮았다. 왕이라는 절대적인 권력의 소유자로, 힘없는 이들을 자신의 광기로 처벌하곤 했던 연산군처럼 일부 네티즌들은 본질을 잊고 집단적 테러에만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런 네티즌들은 사랑도 광적으로 한다. 황우석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으며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대중들에게 장생과 공길이 그랬던 것처럼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  MBC PD수첩이 황우석씨의 연구논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을 때 네티즌들은 다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사진과 신상까지 인터넷에 공개되었으며 단숨에 매국노라는 집단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사실 PD수첩은 장생과 공길처럼 ‘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존경받는 언론의 대표가 되기에는 그 힘이 너무도 미약하였다.

장생과 공길에게도 함께하는 놀이패가 있어 왕이 그 놀이판에 흠뻑 빠져 결국 현실을 보게 했던 것처럼 PD수첩에게도 함께하는 다른 언론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PD수첩이 광분한 대중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을 때 다른 언론들은 숨죽이며 대중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왕의 기분에만 신경 쓰는 신하는 결코 충신도 될 수 없고 왕에게 존경받는 신하, 즉 ‘이’가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언론은 오래도록 왕의 기분을 살피는 신하로서 존재해 왔다. 이제는 대중이라는 새로운 왕을 섬기게 되었다. 언론이 대중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대중이 잘못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어두운 시절 정부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던 것 이상으로 부정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 때에 언론이 제대로 된 신하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대중의 신뢰감 있는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언론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다. 장생과 공길이 줄을 타고 누구는 장구를 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북을 치며 연산군의 흥을 돋웠던 것처럼 말이다. 

김대근 <경상대·경제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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