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그리고 법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며
인권, 그리고 법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며
  • 임성국<공학대 전자시스템 공학과> 강사
  • 승인 2012.09.10
  • 호수 13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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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한다. 욕구에 충실한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합리적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해야 할 말을 한다. 칼럼원고를 부탁받으며 그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동일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난 이 칼럼을 쓰는 동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인권이라는 주제가 다시금 등장했다.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의 인권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배타적인 모양새로 다가오고 있다. 성폭행 피해를 입은 아동의 아버지는 범인을 데려오라고 소리를 쳤다. 죽이고 싶다고 말한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런데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의 인권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피해자의 인권이 침해당했다. 한 아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당했다. 죽을 때까지 자신과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성장하면서 그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렇게 피해자가 인권을 유린당했으니 가해자도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 타당할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내 아이들이 살아야 할 세상에 그런 아동 성폭행범은 존재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이렇다. 과연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의 인권, 이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나누어진 ‘인권’이라는 말은 의미가 있는가?

‘인권’을 말하면서 그 ‘인권’을 존중할 대상을 제한하는 자체로 이미 ‘인권’은 ‘인권’이 아니게 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게 사람들을 던지며 그들을 ‘인권’이 없는 존재들로 취급하며 오락의 도구로 사용하여 희열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미 역사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집에 아이들만 있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사람을 그 집에 들이지 않았다. 그는 유리창을 발로 차며 난동을 부렸고, 나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귀여워 인사하려고 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여기 다 때려 부수고 감옥 가서 죗값 치르면 되지.”

어느 순간 사람들은 몇 년 감옥에 다녀오는 것이 자신의 죄의 대가를 충분히 치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등가로 생각한다. 절도를 하고도 몇 년 감옥에 다녀오면 충분히 죗값을 다 치렀다고 생각한다. 살인을 하고, 폭행을 하고, 한 아이의 인생을 망가뜨리고도 몇 년 감옥에 다녀오기만 하면 그에 관한 모든 대가를 다 지불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감옥은 죄인을 교화하는 곳이 아니라 벌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출소해서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보다는, 자신의 죄의 결과로 누군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이제 더 이상 빚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전과자는 더욱 대담해진다.

자신의 모든 잘못이 탕감되는 벌을 주는 것으로 끝인 지금의 사법제도에 불심검문만 보태면 완전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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