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혁신으로 전통음악의 지평을 넓히다
과감한 혁신으로 전통음악의 지평을 넓히다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2.09.02
  • 호수 13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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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수용해 전통음악의 세계화에 성공한 김덕수
다른 전통음악에 비해 사물놀이는 역사가 굉장히 짧다. 사물놀이는 1970년대 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자 ‘탈춤 부흥운동’과 ‘우리 것 찾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탄생하게 됐다. 조선시대 후기에 풍물놀이를 연주하던 남사당패의 후예인 김덕수, 김용배, 이종대, 최태현이 사물놀이패를 처음 만들었다. 당시 구성된 사물놀이패의 단장이었던 김덕수는 지금도 전통음악의 세계화에 힘쓰며 ‘사물놀이의 거장’으로 불리고 있다.

1957년 당시 5살의 김덕수는 남사당패에 합류하면서 국악 연주를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장구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김덕수는 남사당 무동으로 처음 데뷔했다. 7살 때는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면서 장구신동으로 불렸다. 김덕수는 사물놀이의 거장으로 불리기까지 누구보다도 국악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김덕수는 민중 음악이 세계적인 음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풍물놀이를 실내 공연으로 바꾸고 악기와 연주자 수를 줄이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김덕수를 중심으로 김용배, 이종대, 최태현은 1978년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창단해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위해 1982년부터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수많은 해외공연 속에서 사물놀이가 세계음악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3년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세계 타악인 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무려 9번이나 커튼콜을 받으며 사물놀이 특유의 흡인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김덕수는 세계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국내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994년에는 부여에 사물놀이 교육원을 만들고 1995년에는 사물놀이패 ‘한울림’을 창단해 지금까지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김덕수는 사물놀이의 보존에 노력하는 한편 사물놀이와 다른 장르를 결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에서 힙합뮤지션인 아들과 협연해 사물놀이의 다양한 면모를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김덕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전통을 지키려는 고집보다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력의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참고: 도서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
논문 「전통예술의 현대적 계승사례 연구 :김덕수와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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