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혁명, 독재의 시작이 아니길
군사혁명, 독재의 시작이 아니길
  • 이다원 수습기자
  • 승인 2012.05.12
  • 호수 13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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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 허정
지난 5월 16일 한밤의 정적을 깨고 총 소리가 울려 펴졌다. 나 허정이 4·19혁명 이후 장면 내각이 들어서기까지 과도 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 직을 맡아오다가 정계를 떠난 지 벌써 1년이다.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어쩐지 최근 거세게 불기 시작한 남북협상론의 바람이 걱정스러웠더랬다. 혁신 정당의 남북협상 요구, 학생들의 남북 학생회담 제안, 신민당 일부 의원들의 남북 경제 교류 제의 등 남북 간의 접촉이 당장이라도 이뤄질 분위기였다. 장면 정부는 이런 국민들의 여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불만을 키우고 있다. 남과 북의 협상은 당연히 환영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남북협상을 통해 당장 실질적인 효과를 보기에는 우리 남한의 기반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남북협상론의 고조, 민심의 동요, … 나는 이런 상황에서 군의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국이 불안한 이 시점에 군 세력이 정부에 위험요소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장면 총리가 취임 인사를 하기 위해 나를 찾아 왔을 때, 국방부 장관 문제를 거론하며 군의 움직임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다.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듣던 순간, 남미 군사혁명의 악순환 사태가 떠올랐다. 남미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뒤 평화를 되찾은 듯 했으나 곧 군사혁명과 독재로 혼돈에 빠졌다.

우리도 이번 군사혁명으로 해방 이후 다듬어 온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군사혁명이 성공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위안 아닌 위안을 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군사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하도록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나 3시간에 걸친 긴 간청에도 윤 대통령은 UN군의 개입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린 대리대사의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에 윤 대통령은 달리 책임을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다급해진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내게 대책을 물었다. 나는 북의 남침 위험이 있는 현 상황에서 내란은 어떻게든 피해야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답했다. 자칫 자극적인 행동으로 혁명 세력을 자극했다가 이번 사태가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혁명지도자와 접촉해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군사혁명이 일어나자마자 몸을 피하고 곧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윤보선 대통령도 혁명지도자 박정희의 제안에 따라 각급 군 지휘관들에게 어떤 유혈사태도 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친서까지 써 준 상황이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장면 총리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도 도저히 접촉할 길이 없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내가 그들과 혁명세력 사이에서 관계를 조정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나서서 사태 수습에 혼선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의 저지에도 군사혁명은 성공으로 끝난 듯하다. 과정이 어찌됐든 혁명정부가 기정사실화 된 만큼 혁명정부가 내세운 공약대로 참신한 민정을 탄생시켜 ‘군사혁명의 악순환’만은 막아주길 바란다.

도움: 김지형<인문대 사학과> 교수
참고: 저서 「내일을 위한 증언」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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