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이사 가는 길, 차를 탄 소녀 치히로는 시든 꽃을 두고 툴툴대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그의 부모님은 무관심한 듯 치히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러다 들어서게 된 외딴 산길을 지나며 치히로 가족은 거대한 통로를 만난다. 치히로는 문 안쪽을 향해 바람에 쓸려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느낀다.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네.” 불안함을 직감한 치히로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해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부모님을 막을 수는 없다. 어느 이상한 날, 부모님과의 동행, 뾰루퉁한 소녀 치히로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들어선 공간에서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와 낡은 건물들이었다. 그 광경을 둘러보던 치히로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긴 분명 테마파크였을 거야. 지금부터 한 10년 전에 우후죽순처럼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불경기가 시작되면서 모두 망하고 말았지.”
이 장면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을까. 박기수<국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과거 일본이 ‘버블경제’ 시기에 무리하게 산업을 추진하며 지었던 테마파크들이 이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블경제란 과열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투기 행위 등에 매달리는 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에 주가나 지가가 실제 가치에 비해 폭등한 버블경제 시기 이후 1990년대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영화는 이러한 일본의 상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본의 과거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가진 ‘양면성’의 특징을 부정하지 않는다. 치히로는 응석받이에서 의젓하고 성실한 아이로 변한다. 온천장의 주인으로 탐욕스러운 유바바는 현명하며 너그러운 제니바와 쌍둥이 자매다. 온천장에서 일하는 하쿠는 친절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큰 욕심을 갖고 있다. 온천장의 다른 직원들 역시 노동에 충실하며 근면한 모습을 보이지만 돈 앞에서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박 교수는 “모든 캐릭터들이 가진 양면성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히로, 그리고 모두가 성장하는 이야기
한편 이수경<건국대 동화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는 영화가 가진 전래동화적 특성을 통해 두 콘텐츠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전래동화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출발, 입문, 고난, 귀환으로 이뤄져있다. 이 교수는 논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타난 전래동화의 특성과 상징」을 통해 “치히로는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하며 전래동화 속 주인공처럼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치히로의 새로운 세계는 잡신들이 모여드는 초현실적 공간인 온천장이다.
이 온천장에 들어서는 데에는 전래동화적인 ‘통과의례’가 있다. 러시아의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쁘롭의 저서 「민담의 역사적 기원」에서는 이 통과의례가 ‘저세상’의 입구를 통과하며 저세상의 음식을 먹어야만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되어 죽은 자의 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치히로 역시 온천장 주변 어두운 산속에서 하쿠가 준 특별한 먹을 것, 즉 ‘저세상’의 음식을 먹는다. 이로서 치히로는 온천장의 세계에 입성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됐다.
치히로는 온천장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며 오물을 잔뜩 가진 ‘오물신’을 목욕시키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 댓가로 오물신에게서 마법의 경단을 얻는다. 이 교수는 “센(치히로)이 얻는 경단 역시 앞으로의 통과의례를 위해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 된다”며 “흔히 전래동화 속 주인공들은 통과의례를 통해 마법의 물건을 획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센은 차차 처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버리고 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변한다. 자신을 도와준 하쿠가 위험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노력하는 한편 알지도 못하는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센은 어느덧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