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발효시키는 제과명장
추억을 발효시키는 제과명장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2.05.05
  • 호수 13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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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반죽하다, 권상범<리치몬드제과> 대표이사

긴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빵은 첫 상륙 당시의 낯설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주식의 개념으로도 자리 잡고 있다. 권상범<리치몬드제과> 대표이사의 인생도 그 변화의 흐름과 같았다. 1945년에 태어나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격동의 역사를 함께 한 그는 18살이 되던 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제빵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도제 방식으로 전수되는 탓에 변변한 스승 하나 없던 그는 어깨너머로밖에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기술을 배우던 소년이 지금은 대한민국에 7명밖에 없는 어엿한 제과명장이 됐다.

비 온 뒤 땅은 굳어진다
마포에 자리 잡고 있는 성산본점의 문을 열자 오른쪽 한 켠을 채우고 있는 탁자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손주와 케이크를 먹으며 대학 시절 얘기를 하고 어린 딸은 엄마와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빵집에 녹아들고 있었다. 리치몬드는 그렇게 그들 인생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 그가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30년을 걸어왔다. 그렇기에 홍대점이 지난 1월 31일 문을 닫았을 때 손님들과 각종 언론에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2천여만 원의 가게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힘이 부쳐 내린 결정이었다.

“5년 전에 보증금 100%, 월세 115%를 올려주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켰어.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심사위원, 제과명장, 한국인 최초 프랑스요리아카데미 자문위원을 다 그 곳에서 이뤘거든. 제과제빵인으로서 자존심이었지.”

문을 닫는 날 3천여 명의 손님들이 마지막으로 홍대점의 맛을 느끼고자 찾아왔다. “30년 추억이 사라지게 됐다”며 눈물을 보인 단골손님도 있었다.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손님들의 아쉬움도 그만큼 쌓여갔다.

“난 행복한 사람인거지.” 그가 그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세 달여가 지난 지금은 폐점의 아픔보다는 그동안 손님들에게 의미 있는 빵을 제공했다는 기쁨이 더 크다. 이 일은 ‘동네상권’을 고찰해보는 계기도 됐다. 당시 그 자리에 모 대기업 계열사의 커피전문점이 들어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문어발식 골목상권 진출이 화제가 됐었다.

“프랜차이즈가 꼭 나쁘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어. 20년 전에는 가게 문만 열어도 대충 장사가 잘 됐거든. 사람들이 거기에 안주해서 공부를 안했던 거야. 대형 프랜차이즈가 그 틈을 이용해 파고든 거고.”

선두에 있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앞으로 치고 나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제자리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뒤로 밀린다. 그는 “달리는 말에도 채찍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평생 쉼 없이 빵을 공부하고 배워왔던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리치몬드 탄생, 그 인고의 시간
6·25전쟁이 발발하기 꼭 1년 전이었다. 부상을 입은 북한군이 아군복장을 하고 그의 고향인 봉화로 내려와 동네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갔다. 그 일로 병원에서 근무하던 33명의 직원들이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 모두 몰살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 후로 어머니가 우리 3남매를 홀로 키우셨어. 많이 힘들었지. 말로 다 못해. 그래도 물에 빠지면 어떻게든 숨은 쉬어야 하는 거야. 난 내가 불행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단단한 심성 덕분에 그는 서울에서 홀로 서기를 할 때도 끄떡없었다. 처음 외숙모가 운영하는 빵집에서 빵을 접한 뒤 대구의 한 제과점에서 기술을 배우던 그는 더 큰 곳으로 가고 싶었다. 19살 어린 소년은 단돈 2천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천신만고 끝에 종로 5가에 있는 ‘성문제과’에 들어갔어. 겨울에 너무 추워서 오븐 위에서 새우잠을 자고 그랬지. 그렇게 3개월 일하다가 다른 곳을 가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말씀 드리고 나왔는데 얼마나 춥던지. 2월 엄동설한에 갖은 고생을 다했지.”

2년 동안 기술을 배워오며 경험을 쌓아왔던 그였다. 그런 그가 풍년제과에서 청소, 그릇 닦기를 도맡아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며칠 굶어서 죽을 지경이었거든. 돈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도둑 열차라도 타고 집에 갈 수 있었어. 근데 나는 절대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노라 다짐했어.”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다른 직원들이 쉬는 동안 그는 바닦을 쓸고 그릇을 닦았다. 2천원 받던 월급이 3천원으로 올랐다. 부공장장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동년배 제빵인들이 모이면 ‘너는 참 재주는 없는데 하여간 준비를 잘하고 정말 열심히 한다’고 말해.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재주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야. 성실하게 했던 거지.”

결국 그 능력을 인정받아 나폴레옹 제과점에 공장장으로 가게 된다. 그가 오고 나서 매출이 수직상승했고 5명뿐이었던 직원은 그가 오고 나서 7배로 늘었다. 사장님이 일본 동경 제과학교에 유학을 보내줘 6개월간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때 당시에도 일본은 제과제빵 분야의 선진국이었다.

▲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운이 참 좋았던 게 제과학교 이사장이 그때 자기 여동생을 오스트리아 제과 기술자와 결혼시켰어. 그래서 그 사람이 일본에 있었는데 직접 기술을 배웠지. 그때 배운 빵을 한국에 와서 만드니까 국내에 없는 거라 날개 돋은 듯 팔렸어.”

그의 마지막 목표는 직접 제과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제과를 떠나 마포 경찰서 옆에 1호점을 차렸다. 가격이 비싸 손님의 발길은 뜸했다. 그러나 3개월 뒤에는 좋은 품질과 맛이 소문이 나 손님들이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1호점이 성공을 거두고 홍대점과 성산본점, 이대 ECC점을 차리게 됐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돈이 모일 때마다 해외에 나가 새로운 기술을 배워왔다.

“경력도 경험이라지만 자기 능력을 칼 갈듯이 계속 가는 것이 중요해. 칼은 무뎌져 있는데 자기 경력만 계속 쌓으면 칼이 잘 들 수가 없어.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계속 다니다보면 좋은 게 눈에 보여.”

그는 지금도 자신의 ‘칼’을 갈고 있다. 제과제빵 기술을 공부하고 익히는 일은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그의 오븐은 쉬지 않는다
그가 빵 제조 기술 유입만큼이나 정력을 쏟은 것이 후배 양성이다. 처음 기술을 배울 때부터 형편이 좋아지면 제빵 교실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 권상범<리치몬드제과> 대표이사가 후배에게 제빵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마음먹은 게 있어서 학원을 지은 거야. 기술을 안 가르쳐줄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했지. 외국 실습도 보내고 일본 교육자도 불러서 세미나도 하고.”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각 기술 분야를 대상으로 선정하는 최고의 기능인인 ‘명장’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제과명장은 그가 3번째였다. 제과명장들은 대한민국제과명장배 ‘전국학생 빵·과자 경연대회’를 열고 미래의 제빵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을 물었다. 젊었을 적 목표를 다 이뤘던지라 이제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내 꿈은 건강하게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건 별 다른 거 없어. 제과제빵하고 가까이 있는 것. 빵을 직접 만들지 않아도 점포 운영을 하면서 품질 관리도 하고. ‘손님이 납득하는’ 제품을 제공할거야.”

사진 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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