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앞에 선 영국 총독, 어윈
간디 앞에 선 영국 총독, 어윈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2.03.31
  • 호수 13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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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6일, 간디의 소금행진이 종료되다
▲ 간디와 그의 일행들이 소금 행진을 하고 있다.
나는 현재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총독이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간 외면했던 간디와의 협력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소금행진을 통해 그와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우리 대영제국은 인도를 식민지배하며 그들에게 필수품인 소금에 대해 높은 세금을 책정했다. 인도의 모든 강 끝엔 소금물로 가득 찬 넓은 땅이 있었지만, 정부에서 인정한 소금만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식민지란 모두가 그러하단 생각으로 그들의 고통을 딱히 알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에는 간디가 있었다. 영국에 저항은 하지만 폭력은 일삼지 않는, 반역을 하더라도 체포하기엔 부담스러운 사람. 총독인 나조차 그는 어려운 존재였다.

3월 17일, 간디가 사바르마티 아쉬람에서 소금행진을 하겠다며 출발하던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간디는 소금행진을 진행하기 전에 내게 편지를 보냈었다. “친애하는 친구에게”로 시작하던 그의 편지엔 겸허함이 묻어났다.

“당신을 존경하기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며 자신이 제안한 11개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달라는 권고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엔 협력자들과 함께 소금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할 것이라고 경고하던 그였다.

그는 내 기분을 해치지 않으려던 것인지 영국인 레이놀드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아마 영국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으리라.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도무지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간디는 인도가 독립하기 위해선 인도인들의 자각이 필요하다며 끝내 소금행진을 진행했다. 그간 인도인들은 우리 영국에 종속돼 자신들을 잃어갔다. 우리 입장에선 인도의 문화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만큼 지배하기 쉬운 방법은 없었다. 간디는 옳았다. 그들이 독립을 하기 위해선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78명으로 시작한 소금 행진은 마지막엔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우리 영국 지도자들은 이제 간디의 행동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행동이라 폄하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 판단한 일이었다.

단디 해안에 도착한 그는 주전자에 바닷물 한 움큼을 붓고 끓여 한 줌의 소금을 얻어냈다. 그것은 영국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같았다. 곧이어 그 자리에 있던 수천 명이 같은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나는 이 사태를 저지하지 못했단 이유로 조국인 대영제국에서 유약한 총독이란 평을 듣기까지 했다.

간디의 행동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도인들의 움직임을 막아야 했던 나는 경찰에게 반역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인도인들이 경찰들의 대응에 반대라도 했으면, 폭력으로라도 맞서 싸웠으면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통에 비명만 지를 뿐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완고하게 인도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조지 5세 폐하께 편지를 보내며 인도인들이 체포되는 상황을 기뻐하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도 기독교적 종교 신념은 있었다. 임무에만 충실할 순 없었다.

간디와의 협력이 힘들 것임은 잘 안다. 그러나 왠지 간디를 이해해야만 인도에서 내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든다.

참고: 저서 「간디 평전」, 「행동하는 양심」
도움: 이정호<한국외대 인도어과> 교수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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