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제일가는 친구요, 선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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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연 기자
  • 승인 2012.03.31
  • 호수 13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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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시초, 신문의 등장 배경

신문을 구독하는 유진이는 아침마다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꼼꼼히 읽는다. 실시간으로 기사가 업데이트되는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에 링크된 기사의 헤드라인도 훑어본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언론, 그 등장 배경을 알아보자.

▲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유럽,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다
언론의 기본 행위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전달자와 피전달자를 연결하는 채널의 성격에 따라 대인커뮤니케이션과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나눈다. 통상적으로 언론은 ‘저널리즘(시사적인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의 성격을 포함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언론은 인쇄 매체인 신문이 시초다. 정영주<언정대 신문방송학과> 강사는 “신문은 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던 17세기에 인쇄술, 교통 및 통신의 발달로 신문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던 것이다. 정 강사는 “이 시기에 뉴스의 소재도 풍부해졌다”며 “동시에 신문의 필요성도 커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초의 근대신문은 1609년에 발행된 독일의 주간지 ‘레라치온’이다. ‘레라치온’은 정기 간행물 형태로 등장했다. 이후 독일에서 최초의 일간신문 ‘아이코멘데 자이퉁’이 발행됐다. 자이퉁이란 용어는 알림, 전달, 소식 등의 뜻으로 쓰인다. 자이퉁은 기존 소식지의 부제로 사용되던 ‘새로운 소식(뉴 자이퉁)’의 의미로만 쓰이다 정기 간행물의 제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독일을 필두로 네덜란드, 프랑스 등 전 유럽국가에 신문 발행의 물결이 일었다. 당시 유럽과 북미에는 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기술적인 기반이 확립됐고 18세기에는 완전한 형태의 신문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 네덜란드의 발행인은 이 시기를 ‘신문의 세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활발한 언론출판 활동은 종교 및 정치권력의 탄압에 직면하지만 이에 맞서는 언론자유의 사상이 발전하게 됐다. 정 강사는 “이 시기 신문들은 대부분 정론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론지는 각 집단이나 계층의 상충된 주장과 이해관계를 표출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신문이다. 정론지 성격의 신문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지 성격의 신문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때 신문 대중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공헌한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와 미국의 ‘뉴욕 선(New York Sun)’이 출현한다. 정 강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이 매스미디어로서 기능하게 된다”고 말했다.

독립신문, 한국 언론의 기틀을 마련하다
서양의 언론이 개인의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신문을 공급해왔다면 우리나라의 언론은 나라에서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면서 시작됐다. 정 강사는 “우리나라 언론은 조선시대에 발행됐던 조보가 시초”라며 “조보는 개화기까지만 발행돼 근대신문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의 최초 근대신문은 ‘한성순보’다. ‘한성순보’의 창간사는 “견문을 넓히고 의문점을 풀어주고 상리(商理)에도 도움을 주고자 한다”며 창간 목적을 밝히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개화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 창간사가 보수 세력을 잠재울 수 있었다. 정 강사는 “개화파의 정치활동이 한성순보 등장의 직접적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한성순보는 대중에게 공개하는 영역을 확대해 정보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지만 갑신정변 및 재정적자를 이유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8년 가까이 신문 없는 시대를 살았다. 갑오개혁(개화파 내부에서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을 계기로 신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서재필은 신문 창간을 추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재필은 1896년 정부의 재정 지원 하에 순한글로 된 ‘독닙신문(12호부터 ‘독립신문’으로 제호를 변경)’을 창간한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우리 언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 강사는 “독립신문은 한글로만 발행돼 독자층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언론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널리 인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독립신문은 그 뒤를 이어 발간된 신문들의 기본 틀로 굳어졌고 독립신문의 논조 자체도 다른 신문의 본보기가 됐다.

독립신문은 민간신문으로서 여러 면에서 혁신적이었으나 보수적인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폐간됐다. 이에 정 강사는 “독립신문은 일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했고 의병 활동에 다소 부정적인 관점을 보이는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독립신문은 한국의 자주독립과 국민개혁을 위해 비판적인 논조를 편 것은 사실이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초기의 신문 창간 목적과는 달리 지금의 언론은 고속 성장을 거치면서 기업으로서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 강사는 “논조가 다양한 신문이 나오는 것은 분명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긍정적”이라며 “다만 특정 논조가 과도하게 지배적인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고 이것이 또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권력 체계가 시민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참고: 도서 「커뮤니케이션 발달사」, 「세계  언론사」, 「한국의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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