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에 대항할 세력을 위해
미·소에 대항할 세력을 위해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2.03.17
  • 호수 13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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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 체결
▲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로서 나 아데나워는 조국 독일을 위해 유럽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1955년 초, 독일의 외무부 차관이던 할슈타인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가 동등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 상황이 올 경우, 미국은 군비 부담을 덜기 위해 소련과 군비 축소 문제를 협의 할 것이며, 서유럽의 방위를 우리 독일에게 넘길 것이 분명했다. 조만간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집단방위기구에 가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할슈타인의 예상은 얼마 되지 않아 실현됐다. 그 후에 열린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통일문제와 유럽의 군비 축소문제를 논의했다. 우리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군사력이 약화돼 혼자만으론 살아날 수 없었다. 유럽을 통합해 세력을 구축해야 했다.

1956년 7월, 미국은 유럽에 주둔한 병력을 축소하고 핵무기의 배당을 강화한다는 ‘래포드 계획’을 발표했다. ‘래포드 계획’이 실현되면 서유럽에서 전쟁이 날 것인데, 나는 격전지가 독일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유럽국들과 이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었고, 영국은 경제난을 겪는 상황이었다. 유럽통합 정책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서유럽동맹을 주도하는 영국이 무너져선 유럽이 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가 어려워진 영국은 우리에게 방위비 분담을 요구한 상태였다.

얼마 뒤 유럽경제협력기구에선 ‘유럽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경제부장관 에르하르트와 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유럽경제협력기구 회원국들의 대외경제정책이 각각 다르므로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한 후 관세동맹을 맺어야 앞으로의 통합계획에도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공동시장계획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장계획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협상국에게 6개의 요구를 내놓았다. 물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였다.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강한 반발을 표했다.

에르하르트는 이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의 협상 태도를 공격하며 나를 설득하려했다. 여태껏 독일이 프랑스에 많은 양보를 했기에 이번만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안 된다며 말이다. 에르하르트가 프랑스를 제지하려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 측은 유럽원자력공동체의 설립엔 우호적이지만 공동시장계획엔 동조적이지 않았고, 독일은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론 프랑스 측이 공동시장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나는 프랑스가 공동시장의 설립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측에선 6개 요구를 내놓음으로써 자국의 약해진 힘을 강화하려 했을 뿐이다. 내 생각엔 독일이 프랑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공동시장의 기본 정신이 우리의 것을 모델로 삼고 있기에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를 양보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프랑스와의 타협은 시간문제이니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쯤부터 에르하르트와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영국 측의 마음을 돌려 연합을 이루는 것이 더 시급했다. 수에즈를 둘러싼 패권 싸움에 미국과 소련이 참여하면서 공조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입지가 좁아졌다. 수에즈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를 협력하게 하고 유럽 통합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 몫 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개석상에서 영국의 유럽통합 참여를 호소하는 발언을 했다.

유럽의 연합을 위한 노력이 언제 실현될 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 갈 것이다.

감수: 한우창<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참고: 논문 「독일의 로마조약 협상 전략과 ‘1956년 위기’의 성격」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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