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간 이야기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간 이야기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2.03.17
  • 호수 13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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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자를 중심으로「라쇼몽」바라보기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자신의 아내 마사코를 말에 태우고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는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 그녀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는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마사코를 겁탈한다. 숲속을 지나가던 나무꾼은 타케히로의 시체를 발견한 뒤 관청에 신고하고 이들이 모여 심문이 벌어진다.

▲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아내 마사코가 법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타조마루는 타케히로를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사코는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이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타케히로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영화「라쇼몽」은 겉보기엔 명백한 듯한 사건을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만든다.

이처럼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던 까닭은 독특한 서술 구조 때문이다. 영화에는 다수의 서술자가 등장하면서 각각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이는 원작 소설「라쇼몽」과 「덤불 속」을 결합시키면서 발생한 것이다. 장우진<아주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다층적 서술 층위는 원작의 논증을 한층 강화시킴으로써 원작 소설보다 더욱 강력하게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기능을 한다”고 전했다.

영화와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다중 인물 시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에 나무꾼과 승려, 행인이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들었거나 직접 목격한 사실을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는 삼중의 시간 구조를 이루도록 도와줬다.

안영순<순천향대 영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감독이 이처럼 세 개의 시간적 차원을 탁월하게 표현함으로써 영화적 표현을 풍부하게 했기 때문에 감독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공간의 상징적 분위기와 현재 시점은 소설 「라쇼몽」에서, 사건과 과거시점은「덤불 속」에서 차용했다. 안 교수는 “라쇼몽이라는 장치로 현재의 시공간과 과거를 분명하게 갈라놓으며 쏟아지는 비를 사용한 부분에서 감독의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S#1
지붕이 절반 이상 무너진 라쇼몽 전경. 라쇼몽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쉬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작고 희미하게 보인다. 승려와 나무꾼, 댓돌 위에 걸터앉아 돌층계 위에 내려치는 빗방울을 쳐다보면서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
나무꾼: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승려, 침통한 표정으로 그런 나무꾼의 옆얼굴을 흘끗 보지만, 다시 시선을 빗발 쪽으로 돌리고 꼼짝 않고 있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인물은 나무꾼이다. 나무꾼은 살인사건을 발견하는 또 한 사람의 목격자로 강화됐다. 이로써 관객을 작품 전체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S#2
갓난아기를 안고서 멍하니 서 있는 승려와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무꾼. 아기가 또 다시 보채기 시작한다. 나무꾼, 고개를 든다. 나무꾼, 가만히 승려의 손 안에서 보채고 있는 아기를 쳐다본다. 잠시 망설이다가 승려에게 다가가 아기에게 손을 댄다.
승려: 뭐야! 이 핏덩일 어찌 하려고?
나무꾼: 집에 돌아가면 아이가 여섯이나 있소. 하지만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힘들긴 마찬가지요.
승려: 내가 부끄러운 말을 했군요.
나무꾼: 이해하오. 날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부끄러운 건 바로 나요. 나도 내 맘을 모르겠소.
승려: 아니오. 이건 고마운 일이요. 덕분에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구로사와는 원작 소설의 각색을 통해 아기를 새롭게 창조해냈다. 원작에 없는 이 아기의 등장은 원작과 시나리오의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엔딩에서 나무꾼이 아기를 안고가는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두 원작 소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넘어서 미래의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움: 안영순<순천향대 영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참고: 논문「아쿠타가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의 영화적 변용」,
「영화 라쇼몽을 통해 본 다층적 서술 구조의 기능」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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