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일함에 대해 자기위로하는 삶
안일함에 대해 자기위로하는 삶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2.03.04
  • 호수 13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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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수많은 원인 중 하나는 관리담당자의 ‘안일함’에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1/3가량만 낮췄어야 했을 원자로 출력 수준을 실수로 과도하게 낮춰 정지 상태에 이르렀던 것에서 시작한다. 당시 담당자는 이를 무리하게 높이고자 했는데 결국 제어가 어려울 정도로 출력 수준이 높이 올라갔고 이를 수동으로 수습하려다 원자로가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원자력발전소 내부 요소 중 가장 거대하고 위험한 요소는 다름 아닌 안일함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함이야말로 발전소 내 그 어떤 장치보다도 위협적이었고 이것이 결국 재앙을 불러온 것이었다.

안일함은 많은 역사를 탄생시켰다. 이상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예는 물론 각종 자연 재해에 심지어는 국제분쟁까지, 안일함이 낳은 역사들은 사람들에게 굵직하게 기억되고 있다.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었다는 심정적인 비극 때문이다. 안일한 마음가짐 하나로 ‘할 수도 있었던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악재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면 그 비극, 즉 죄책감 또한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종종 이런 안일함 뒤에 ‘자기위로’를 덧붙이곤 한다. 자기위로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며 이어 “어쩔 수 없었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덧붙이는 식의 논리다. 일종의 자체적 보호 행위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란 말은 “괜찮다”는 말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위로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앞서 드러난 ‘이상한 정당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님’이 왜 ‘괜찮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묘하다. 우리는 때때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란 말로 너무 많은 것들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 말은 ‘정당화’가 아닌,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변명’에 더 가깝디.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런 ‘변명’을 마치 ‘근거’처럼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가 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잘못불감증’이다. 자기위로는 잘못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한다. 자기위로는 정신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또한 그것에만 유용하다. 그러나 이 자기위로가 본래 용도 이상의 역량을 발휘하게 될 시 개인은, 또 사회는 ‘잘못불감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고 반성하는 태도가 부재한 사회에 희망은 없다. “과거를 부정하는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는 말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해져야 한다든가, 치열함이 결국 선이란 말이 아니다. 안일하지 않은 삶이 결국 치열한 삶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안일함이 궁극적인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안일함으로 인한 잘못에 대해 ‘자기위로’의 무기로 맞서 싸우는 삶이 아니길 바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란 변명에서 ‘잘못불감증’에 빠져드는 삶으로 나아가지 않길 바란다. 누구의 삶이든 그 정도로 비참하진 않기를 바란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는 안일함에서 비롯됐다. 만일 이 안일함이 결국 자기위로로 나아간다면 다시 한 번 재앙은 발생할 것이다. ‘폭발 사고’에만 염두를 둔 예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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