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심장은 멎었으나
유신의 심장은 멎었으나
  • 이우연 수습기자
  • 승인 2011.11.12
  • 호수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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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6일 발표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전모’

▲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전모'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탕! 탕!”

궁정동의 총성이 울린 지 11일이 지났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유신은 이렇게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했다. 사실 아직도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죽인 자가 박정희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라니. 잠시 쉬기 위해 사무실 밖을 나온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 후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해보기로 했다.

대통령의 죽음 직후인 10월 27일부터  부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그 후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이하 계엄사) 내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부)의 장에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임명됐다. 군무원인 나는 계엄사령부 내 비서실에 말단인사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오늘 11월 6일, 합수본부장 전두환은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한 전모를 발표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10월 26일 오후 6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여가수 등과 만찬을 열었다. 만찬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그는 차지철과 대통령에게 권총을 쏘고 미리 불러놓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그의 수행비서, 운전수, 경비원과 함께 차를 타고 궁정동을 떠났다. (중략) 결국 김재규의 시해 원인은 대통령이 돼 보겠다는 과대망상이었다.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작은 전혀 없었다.”

나름대로 계엄사 내에서 상황을 지켜본 나조차도 이 발표를 완벽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계엄사 내에서 많은 것들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 맞을까.

계엄사는 이 사건을 ‘권력욕에 사로잡힌 부하가 국가 원수를 살해한 패륜적 사건’이라 단정 지은 상태에서 수사에 착수했다. 자신은 민주화를 위해 거사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김재규에게 대통령이 되기 위해 패륜행위를 저지른 것이라 솔직히 고백하라며 가혹행위를 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가수와 여대생에게 “현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다툼이 있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진술하라”고 강요한 것 또한 당시 극단으로 치닫던 권력 암투 관계를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물론 나도 김재규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권력욕에 의한 행동이라는 이번 발표 또한 어설픈 것은 마찬가지다. 부마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온 김재규가 그것이 일부의 폭동이 아닌 전 계층적 항쟁이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는 소리가 있었다. 평소에 그가 집무실에 “대의멸친”, 즉 대의를 위해서는 친분을 고려하지 말라는 족자를 걸어 두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지금 군 내부 또한 많은 혼란에 휩싸여 있다. 대통령의 죽음 이후 권력은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 갔고 보안사령관이자 합수부장이 된 전두환은 계엄사의 수사 방향을 주도하고 있다. 또 내부의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회’라고 하는 군부 내 강경세력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그 주변 세력으로 대변되는 온건파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온건파는 강경파와 달리 현재 유신헌법의 폐지와 새 헌법의 제정, 민선 정부의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YH 여공 농성 사건, 부마항쟁으로 이어지고 있던 민주화의 물결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어쩌면 헛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담뱃불이 꺼졌다. 김재규가 혁명가인가 패륜아인가 하는 것에 세상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지금, 나는 곧 다가올 더 큰 혼란을 직감하며 다시 사무실로 향한다.

도움: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참고: 논문 「10·26 사건의 배경 분석」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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