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에서 배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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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11.05
  • 호수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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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시작

 

▲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는 루터>
오늘도 독일 전역은 농민들의 혁명으로 시끄럽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벌써 세 달 째다. 친구들도, 같이 농사지으며 일하던 주민들도 혁명에 가담해 영주들과 가톨릭교회에 맞서 싸우고 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함께 현장에서 혁명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는 혁명군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권위주의에 반기를 들고 급기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게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농민들은 그가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기존의 불공평한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착취하고 부를 쌓던 영주들과 교회의 횡포에 대한 반감을 터뜨리게 될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여겼던 것이다.

루터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며 지위와는 무관하게 믿음으로 구원받으리란 그의 말에 모두가 감동했다. 그 말을 듣고서는 루터가 우리 농민, 그러니까 민중의 편에 서서 우리를 지지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우리의 편에 서지 않았다. 농민군이 요구한 ‘12개 조항’의 일부는 찬성하지만 무장 반란은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고 말했고, 현실에서의 계급 차이는 필요하다고 했다. 루터는 자신을 지지해 주던 귀족 세력을 따른 것이다. 농민들은 철석같이 자신의 편이라 믿었던 루터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 무리에 대항하여」란 책자에서 영주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폭도들을 처형하라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95개조 반박문’에서도 그가 귀족 세력 기반의 종교 혁명을 계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농민들은 거의 다 문맹이었고, 쓰는 언어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였다. 그는 반박문을 라틴어로 써서 게재했었다. 농민들은 반박문의 내용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개혁이 전파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의 ‘95개조 조항’은 지식인들 간의 신학적인 논쟁을 위해 붙인 것이었다. 결국엔 종교 개혁이 권력 중심으로 흘러가길 바랐던 게 아니던가. 이에 나는 혁명 운동을 지속한다 해도 바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민중의 평등은 고려하지 않고 시작했던 종교 개혁이기에.

그런 루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를 지지해 주고 지켜주던 영주의 편에 서지 않으면 가톨릭교회의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뒷받침해줄 귀족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찌됐건 루터의 개혁은 민중에 대한 우려와 면죄부 판매를 주도한 종교계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가 반박문을 내건 것은 없는 살림에도 돈을 모아 면죄부를 사려 했던 민중이 안타까워서였고, 면죄부의 가치를 그대로 믿는 그들을 성서에 근거한 믿음으로 구원하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루터 나름대로는 민중을 구하기 위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농민들은 영주들과 가톨릭교회에 반한 혁명을 지속할 것이다. 많은 농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영주들과 교회 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없다. 독일 전역에 퍼져있는 루터의 사상이 우리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었더라면 지금과 같았을까. 

도움: 박경수<장로회신학대 신학과> 교수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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