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지켜준 비밀경찰, 그의 이름을 찬미하며
내 삶을 지켜준 비밀경찰, 그의 이름을 찬미하며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10.31
  • 호수 13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인간애, 영화 「타인의 삶」

“들어와.” 메마른 얼굴의 경찰은 심문을 받으러 끌려오는 남자에게 명령조로 말한다. “두 손은 다리 밑에 넣도록.” 심문을 받는 동안 손의 체취는 의자에 배어든다. 지독한 심문을 끝낸 후 의자 쿠션의 천 조각을 잘라 병에 담으면 그의 체취는 영구히 보관된다. 화면은 곧장 강의실로 옮겨진다. 메마른 얼굴의 경찰은 어느 새 강의실에 서서 학생들에게 첫 장면에서 이어지는 영상을 보여주며 ‘심문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구체적이고도 철저한 모습이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정보기관 ‘슈타지’의 일원인 주인공 비즐러는 비밀경찰로서의 책무에 충실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교육 중 그가 심문하는 영상을 보여주자 한 학생이 “심문이 왜 이렇게 깁니까, 이것은 비인간적입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오랜 연륜으로 노련함을 자랑하는 비즐러는 ‘결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각기 다른 반응을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도청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고 덧붙일 뿐이다.

영화 「타인의 삶」은 1984년의 동독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2차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의 동부 지역인 동독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정보기관 ‘슈타지’는 동독 정부의 핵심적 권력기관으로서 세력을 자랑한다. 그곳에는 탐욕스러운 그루비츠 중령이 있다. 자유로운 문화계를 억압하는 '문화부'장관도 있다. 그루비 중령은 장관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동독의 유명 극작가 드라이만의 흠을 잡아내고자 한다. 장관이 드라이만의 연인이자 여배우인 크리스타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루비츠는 비즐러에게 드라이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보라 한다. 호기심을 느낀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집을 비운 사이 그와 연인이 머무는 집안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한다. 이들의 공존 아닌 공존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종종 실존인물들의 이름을 비유적으로 내비친다. 영화 속에서 종종 언급되는 ‘에리히’는 실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제1서기였던 최고 권력자 ‘에리히 호네커’다. 첫 장면에서 심문을 받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베르너 글레스케’란 이름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 ‘베르너 슈틸러’는 슈타지의 요원으로서 사회주의통일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았고 국경을 넘어 도망치려고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독사회의 구체적인 것들을 반영한 영화 「타인의 삶」은 나아가 좀 더 큰 틀에서 통제된 사회의 병폐를 드러냈다. 비즐러와 그루비츠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슈타지의 한 말단요원이 동료들에게 서기장 에리히에 대한 농담을 건네는 것을 듣는다. 뒤늦게 알아챈 요원이 말을 멈추자 그루비츠는 계속하라 한다. 직관적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말단 직원은 숨을 고르며 농담을 재개한다. “우리의 서기장 에리히님께서 태양한테 그랬대요. ‘안녕 태양아.’ 그러자 태양이 대답했죠. ‘안녕’. 오후에 또 물었어요. ‘안녕, 태양아.’ 태양도 그랬죠. ‘안녕.’ 밤에 일 끝나고도 인사를 했어요. ‘안녕, 태양아.’ 그런데 태양이 대답을 안 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또 물었죠. ‘안녕, 태양아, 무슨 일이야’ 태양은 답했어요. ‘이 멍청아, 무슨 일이기는, 내가 하루 종일 참아줬잖아!’” 얘기를 들은 모두가 웃는다. 그러나 이내 웃음기를 거둔 그루비츠는 말단 사원에게 묻는다. “자네 이름이 뭔가. ID 번호는, 또 어느 부서인가. 자네 경력에 얼마나 큰 손상이 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어 그루비츠는 이번엔 자신의 유머를 내놓는다. “에리히와 전화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전혀 없어. 둘 다 그냥 들고 돌리기만 하면 된다네.” 말단 사원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얼마 안 돼 그는 좌천돼 정보국 부서를 떠나게 된다.

▲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으며 감상에 젖는 비즐러>
사원의 농담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경숙<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서기장인 에리히가 외부 사정을 재빠르게 이해하지 못함을 비꼬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이 흘러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위치를 바꿨음에도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에리히와 그에게 성을 내는 태양의 대화를 이용한 것이다. 이를 듣고 호탕하게 웃던 그루비츠는 에리히와 전화를 비교한다. ‘든다’는 표현은 ‘hang’의 의미로, ‘전화기를 든다’는 뜻도 있지만 사형에서 ‘목을 맨다’는 뜻도 있다. 또 ‘돌린다’는 것은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다이얼 돌리듯 쉽게 조직 인사를 바꾼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전화기를 ‘들고’ ‘돌리듯’ 말단 직원의 인사문제를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에리히의 막강한 권력을 표현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루비츠는 문화부장관에게 ‘당(사회주의통일당)의 문장과 칼’을 강조하며 그에게 아부한다. ‘당의 문장과 칼’이란 말은 비즐러가 탐욕적인 그루비츠에게 점차 더 큰 환멸을 느껴가며 그에게 당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데에도 쓰인다. 이 교수는 “비즐러는 당의 일원으로서의 소임을 뜻하는 이 말을 통해 스스로에게는 자부심을, 그루비츠에게는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소용이 없없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비즐러뿐만이 아니었다. 드라이만의 집에 도청장치가 설치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해야했던 이웃인 마이네케 등 일반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이네케는 평소엔 드라이만의 부탁으로 넥타이도 매줄 만큼 친절하지만 도청 사실을 발설할 경우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비즐러의 협박을 이길 순 없었다. 이 교수는 “영화 내용에서는 삭제됐지만 시나리오 상에 마이네케가 선인장을 선물 받은 내용이 있었다”며 “가시 돋은 선인장을 간직하며 매사 말조심하란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감시를 하는 비즐러와 그에게 감시 받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그러나 삼엄한 사회도 인간애를 막을 순 없었다. 영화 「타인의 삶」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그리고 나아가 이들을 감시하던 비즐러의 인간애가 드러난다. 비즐러는 이들을 감시하다가 이들의 열정과 사랑 등 인간적 삶에 동화된 것이다. 비즐러는 한 꼬마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당을 흉봤다는 사실을 말한 것조차 더 이상의 추궁 없이 눈감아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남자를 지독하게 심문하던 비즐러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드라이만의 크리스타, 드라이만과 그의 동료인 예어스카의 관계에서 역시 이런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동독 사회에서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경직된 압박 속에 살아갔다.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조수진<예술학부 연극영화학전공> 교수는 “통일된 독일에서 동독 예술인들의 입지는 급격히 작아졌다”고 설명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는 과정에서 동독의 정치, 학술, 예술 등은 사실상 다 무너졌다. 조 교수는 “극소수의 동독 출신 감독들이 간간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정도”라고 덧붙였다. 통일 과정에서 동독인들은 ‘악덕’으로 변해버린 ‘사회주의 사회의 미덕’을 버릴 것을 강요당했다. 소외되고 밀려난 삶이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영화는 이들의 이런 상실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다소 피상적인 결말을 내렸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밝혔다.            
           
참고: 논문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 나타난 과거극복의 문제」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