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의 ‘폭력 혁명’, 그러나 나는 말뿐이었다
체의 ‘폭력 혁명’, 그러나 나는 말뿐이었다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10.01
  • 호수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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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총살당하다

                                                                                                                                                                

▲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10여 년 전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의사가 있었다. 아니, 의사 출신 혁명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체 게바라다. 그와 의대 동기였던 나는 그의 총살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기껏 공부해 얻은 의사란 직업을 두고 혁명가가 된 이유가 궁금해 그에 대해 알아보게 됐다.

그는 의대 재학 중임에도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돌아다니는 방랑 여행을 떠났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의사 학위를 따려 노력했던 우리와는 달랐다. 당시에는 그저 모험심 많은 청년이라 생각했었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노동 착취의 현실에 눈뜨게 됐다고 말했다 한다. 당시 도서관에서 밤낮 없이 공부만 하던 내게 그는 신선한 존재이자 한편으론 현실감 없는 이상뿐인 사람이었다.

여행 후 사회주의에 공감하게 된 그는 1954년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쿠바의 혁명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와 손을 잡고 82명의 반군을 구성해 쿠바 상륙작전을 펼치기도 했고, 산골마을을 전전하며 군 재건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후 쿠바 내의 반정부 세력과 합류해 게릴라 운동을 통해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해 낸 쿠바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쿠바에서의 성공으로 얻은 명성을 버리고 볼리비아에서도 혁명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하게도 부상을 입어 테이블 위에 누워 있다가 총살당했다.

그가 행했던 혁명의 정당성과 혁명을 통해 추구한 뜻은 인정한다. 의사로서 진정한 의사의 길에 대해 사유한 사람이었다고도 생각한다.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일반 국민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본 그는 자본가들의 횡포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다짐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생각을 가지기는 쉽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올바른 정치 공동체라면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를 온 몸으로 표현했다.

나로서는 그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행동으로 따르고 싶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접근했어야 했다. 굳이 총과 칼로 혁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까. 폭력 행동은 정치적 혼란을 조성해 혁명 여건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과격한 폭력 행동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설교와 선의만으로는 민중을 해방시킬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항했더라면 혁명 과정에 생긴 사상자와 농민들의 피해는 적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의사 출신으로 군사적 전략을 짜는 데 미숙했다. 차라리 농촌을 다니며 낙후된 의료 시설을 개선하고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며 의사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정치의식이 결여된 그들을 일깨워 줌으로써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알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민중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거리에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있다. 포스터를 마주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닥쳐온다.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했지만 말 뿐인 나 자신이 왠지 초라해진다. 같은 의사이지만 대중 혁명을 지도한 그에 비해 조용히 진료실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내 모습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도움: 백기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책임연구원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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