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도 종교도 학살의 이유가 아니었다
인종도 종교도 학살의 이유가 아니었다
  • 김지연 기자
  • 승인 2011.10.01
  • 호수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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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빚어낸 제주 4·3 사건
제노사이드란 한 집단이나 규범을 절멸하기 위해 집단의 존재 자체를 위험 속에 몰아넣고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같은 야만적인 행위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있었을까.

1948년에 체결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하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인종이나 종교 갈등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 정의에 국한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인종이나 종교 갈등을 뛰어넘는 우리나라만의 제노사이드, 제주 4·3 사건이 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도로 개최된 3·1운동 기념대회에 3만 명 이상의 도민이 참가했고 경찰은 집회의 해산을 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섯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도민들은 이에 대해 경찰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공동 투쟁 위원회를 결성해 3월 10일에 총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미군정 측은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섬’이라고 판단했고 이승만은 1948년 11월 중순에 제주 지역 초토화 작전을 시행해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다.

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생한 제노사이드로 해석할 수 있다. 최호근<고려대 역사연구소> 교수는 저서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를 통해 제주에서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된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로서 이는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았다”며 “제주도민들을 죽음으로 몬 빨갱이 논리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 감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해자 집단이 안정적인 정부 체제를 구축하는 데 걸림돌이었던 제주도민을 보는 시각은 오로지 빨갱이였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들을 공식적으로 위험한 사람으로 여겼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단지 흉악한 존재로만 인식되던 빨갱이로 여긴 것이고, 이는 무조건적인 대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특수한 우리나라만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은 제주 4·3 사건이 제노사이드임을 반증한다.

현재까지도 제주도민에게 큰 멍울로 남아있는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수는 1만 5천여 명에서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이같이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정작 이데올로기적 갈등 자체는 큰 갈등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갈등으로 3만 여명의 희생자와 제주도민들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긴 것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참고 : 저서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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