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09.17
  • 호수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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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의 잔잔한 초상과 사랑

그저 타인이기만 했던 누군가가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의 동네 근처만 가도 설레고 그가 듣던 음악이 들려오면 눈을 감게 되며 그가 자주 입던 옷만 봐도 가슴이 아린다. 사랑의 시작은 그 사람이 존재한단 것만으로도 행복을 준다. 그러나 사랑을 시작도 못하고 ‘간직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한 남자가 있다.


S#1. 신파적이지 않은 로맨스

정원은 서울 변두리에서 '초원 사진관'을 운영하는 삼십대 중반의 사진사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삶을 조용히 정리하려던 그에게 어느 날 생기발랄한 주차 단속원 다림이 나타나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매일 사진관에 사진을 맡기고 일에 지쳐 푸념을 늘어놓는 다림이 사랑스러워진다. 죽음 앞에 담담하던 정원은 다림으로 인해 살고 싶어진다.

▲ <비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다림과 정원>
영화가 신파적이라면 정원의 병이 기적처럼 나아 사랑이 이뤄지거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다림과 연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사랑의 고백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원은 비 오는 날 다림과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서도 다림의 어깨에 손조차 두르지 않는다.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다 젖은 다림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만 할 뿐이다.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사랑을 ‘소유’하려 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랑을 지켜내려 한다. 상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S#2. 사진으로 영화를 말하다

사진은 삶에서 마주친 순간을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한 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정원은 옛 애인인 지원을 사진관 쇼윈도에 걸어놓았다. 그러던 정원은 지원의 사진이 있던 자리에 다림의 사진을 걸어놓는다. 유성호<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영화 전반은 쇼윈도에 지원의 사진이 다림으로 바뀌는 과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원에게 쇼윈도의 사진은 추억을 간직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영화에서 사진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라짐과 추억을 보여주는 기능도 한다. 정원의 아버지는 자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을 아들과 가족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아버지는 한 컷을 담아내며 아들의 모습을 남기고자 한다.

▲ <죽기 전 자신의 영정사진을 준비하는 정원>
삶과 죽음을 나타내는 사진 중 가장 대표되는 것은 영정사진이다. 초원 사진관에 한 가족이 와 가족사진을 찍는다. 아들은 어머니께 후에 영정사진이 될 독사진을 권한다. 죽음을 준비할 나이가 된 어머니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두렵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사진사인 정원만 컷에 담은 것이 아니라 착잡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드는 아들의 모습도 같이 담아냈다.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정원도 사진사가 아닌 손님의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치고 타이머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원이 웃는다. 그 미소는 이내 영정사진의 것으로 바뀌어 정원의 존재를 마무리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사진관에 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정원 역시 사라져갈 친구들과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려 한다. 때마다 발생하는 순간을 드러내기 위한 사진은 삶과 죽음을 연결시킨다.


S#3. 창으로 소통하다

정원의 사진관은 유리문으로 돼있다. 사진관을 찾아온 다림이 창 너머에 서서 정원에게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장면, 정원이 자리를 비운 사진관에 가 홧김에 창에 돌을 던진 장면에서도 창은 등장한다.
정원과 다림의 사이에서 유리창은 단절된 관계를 나타낸다. 자신을 향한 다림의 마음을 알지만 죽음을 앞에 둔 상황은 정원이 다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 <다림을 몰래 찾아가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정원>
둘 사이의 단절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다림을 몰래 찾아간 정원이 창문너머로 보이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장면이다. 다림은 정원을 보지 못하지만, 정원은 다림이 멀어져가는 것을 유리창을 통해 본다. 유리창은 갈라지는 사랑과 죽음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옛 애인인 지원이 사진관에 왔을 때 유리창은 감정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지원을 보며 유리창을 청소하는 정원의 얼굴이 창에 비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려 하지만 지원을 향한 그리움이 아직 묻어난다. 그런 지원을 씻어내듯 창을 청소한다. 지원은 정원에게 쇼윈도에 걸려있는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정원은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고 담담히 독백한다.


S#4 일상이 드러내는 부재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는 장면 곳곳에 등장한다. 친구 아버지의 문상을 가는 장면, 횟집 도마 위의  생선을 바라보는 정원의 시선, 영정사진을 찍는 할머니 등 죽음이 현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도처에서 환기하고 있다.
어린 정원은 텅 빈 운동장을 보며 언젠가는 자신도 부모님도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원이 다림에게 귀신 이야기를 할 때 다림이 무섭다고 하자 “우리도 언젠가는 귀신이 될 거 아냐”라며 답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정원에게 죽음은 완전한 부재가 아닌 현재의 존재가 모습을 바꾼 것이다.

영화는 여느 시한부 주인공의 이야기와 달리 정원의 '일상’에 무게를 두고 있다. 발톱을 깎고, 파를 씻어 아버지와 함께 된장찌개를 끓이고, 동네 아이들의 싸움을 말린다. 관객들은 시한부 생을 사는 정원이기에 그의 평범한 일상조차 특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도움: 유성호<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참고: 논문 「8월의 크리스마스 그 익숙한 공간의 낯설음」, 「멜로 영화 콘텐츠의 스토리텔링 전략 분석」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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