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의 문을 열어준 「대한제국애국가」
개화의 문을 열어준 「대한제국애국가」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09.03
  • 호수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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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9월 7일 프란츠 에케르트 작곡 국가 최초 연주
▲ <프란츠 에케르트>
그는 대한제국의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가 지도한 군악대가 번쩍이는 서양 악기를 들고, 화려한 제복을 입은 채 행진하는 모습은 황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문명의 충격에 빠뜨렸다.

그를 대한제국으로 데려온 데는 나 민영환의 공도 컸다. 1886년 7월에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던 나는 러시아 군악대의 행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 후 고종황제께 군대 사기 충전을 위해 군악대를 창설하자며 상소를 올렸다. 고종황제 역시 서양의 군악대 행렬에 자극을 받았던 터라 흔쾌히 승낙하셨다.

군악대를 이끌어 줄 선생을 찾고 있던 중 독일 대사인 하인리히 바이페르트가 내게 에케르트를 천거했다. 그는 일본에서 1899년 3월까지 군악대 지휘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초빙해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그는 다양한 서양 악기들을 일본에 전수하는 것뿐 아니라 서양 음악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300원의 계약금으로 우리의 부탁을 승낙해 줬다. 그는 이내 1901년 2월 19일에 조선에 당도했다.

그가 조선에서 하게 될 일은 일본에서 했던 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얻은 경험으로 조선의 군악대를 이끌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계속해서 들려줬고, 군악대원들은 서양의 것을 배운다는 신기함에 열심히 악기를 배우고 서양 음악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재주가 있다며 좋아했다. 24명으로 시작했던 군악대는 70명이 됐고, 왕궁 내에서 뿐 아니라 매주 목요일마다 탑골공원에서도 연주했다.

그의 귀중한 업적 중 하나가 1902년 9월 7일 고종 황제의 탄신일에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해 연주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를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듣고서 조선의 음악을 알기 위해 궁중 아악과 민간의 음악을 들으며 악상을 떠올렸다. 궁중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 음악을 듣고는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그는 조선의 정서를 담기 위해 비오는 날의 천둥소리까지 살필 만큼 조선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국가는 조선의 전통적 음계를 바탕으로 해 조선의 정서가 묻어나는 듯 했다. 처음 듣는 악기 소리에 군중들은 넋을 놓은 채 군악대를 바라보며 국가를 듣고 있었다. 잦은 해외 방문을 통해 외국 문물을 많이 접한 내게도 그가 작곡한 국가는 독창적이어서 큰 감동을 줬다. 황제 폐하 역시 흡족한 표정으로 국가를 경청하고 계셨다. 그에 대한 공로로 황제께서 그에게 1902년 12월 태극 3등급 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에케르트의 영향을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군대의 사기 충전 측면에 중점을 뒀으니 말이다. 나라가 먹고 살기에 바빠 문화적인 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의 문화가 폭넓어지고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로 인해 서양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앞으로 나는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한다. 정치제도도 유럽의 것을 보고 개편할 것이며 민권신장에도 힘을 쓸 것이다. 군악대의 연주라는 신문물을 접했으니 개화사상에 대한 제국인들의 반감도 줄어들지 않을까하는 기대해본다.

도움 : 이상만 음악평론가
참고 : 논문 「소민과 군주의 나라에서 부른 대한뎨국 애국가:
황립 군악대와 프란츠 에케르트」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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